박만춘의 인생이 꼬였다. 전작 영화를 말아먹고 빚더미에 앉아있으며 장항준 감독이 계단을 오르다 다리가 부러질 만큼 높은 달동네의 허름한 단칸방에 사는 박만춘. 더 이상 꼬일게 있을까 싶었는데 기적처럼 한 바퀴 더 엉켰다. 경위는 이렇다. 어느 날 선배가 찾아왔다. 선배는 일본의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저예산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전한다. 천만 원에는 팔 수 없는 자존심과 영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으로 벌컥 화를 내던 박만춘은 1억 원이라는 돈에 일본행을 결심한다.

원래 인생이란 그런 거다. 이상도 중요하고 자존심도 버릴 수 없다. 그럼에도 1억이면 혹할만하다. 빚은 갚고 살아야하지 않겠나. 영화 한 번 찍어주자는 마음으로 일본에 도착한 박만춘은 의뢰인 와타나베를 만난다. 순간, 섬뜩한 찰나의 깨달음이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친다. 그는 야큐자의 보스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박만춘은 영화를 찍기로 결심한다. 약속도 약속이고 체면도 체면이지만 무엇보다 야쿠자의 보스가 두렵다. 이제 영화를 찍기 위한 연극이 시작된다.

- 주인공 이름 와타나베, 주연 와타나베, 시나리오도 와타나베!

연극 ‘사나이 와타나베, 완전히 삐지다’는 사나이 기질로 무장한 와타나베와 소심한 남자 박만춘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고양이와 그 앞의 쥐 같은 두 인물들은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고 와타나베는 바다이야기를 꺼낸다. 하고자하는 말의 핵심은 이렇다. 사람은 바다에서 태어났다. 고로 바다를 벗어나 육지에 살고 있는 인간은 외롭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멋있는 것 같기도 한 와타나베에게는 절대 단점이 있다. 바로 삐친다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잘 삐친다. 두 달에서 삼십 년짜리까지 종류와 기간도 다양하다. 기르던 개에게도 삐쳤다.

파란 대문 앞 붉은 치마의 여자, 그리고 흐린 배경. 박만춘이 완성한 시나리오를 읽고 난 다음날 와타나베가 불쑥 건넨 말이다. 이 장면은 박만춘이 찍은 전작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와타나베는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는다. 박만춘은 놀랍게도 아직 죽지 않고 남아있던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 박만춘은 연설한다. 파란 대문은 들어갈 수 없는 집이자 안식처, 이데아고 붉은 치마는 아름다우나 상처받아 너덜해진 여자를 상징하며 흐린 배경은 흐린 날과 잘 어울리는 어쩌고…… 와타나베가 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이것이다. 그 시나리오를 자신이 고치는 것. 영화역사상 최악의 졸작 시나리오가 탄생하기 직전이다.

- 서로 다른 얼굴, 모두가 같은 외로움

와타나베는 영화를 무협물로 만들어왔다. 120명과 홀로 싸워 이겼으며 2미터를 날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여덟 명을 죽였다. 차라리 장풍을 쏘라는 박만춘의 비아냥거림에 심사가 뒤틀린 와타나베는 나가버렸다. 와타나베의 치명적 단점이자 절대 매력, 삐침이 발동한 것이다. 와타나베의 삐침은 연극의 제목으로도 사용될 만큼 서사의 핵심중 하나다. 야쿠자 보스 와타나베의 그 이상하고도 코믹한 성격은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로 가득하나 이면의 씁쓸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고독한 인간이다. 과장하자면 일종의 애정결핍의 표출이다. 와타나베는 열 살에 아버지의 술에 양잿물을 타 지긋지긋한 그늘에서 벗어났다. 가난이 싫어 야쿠자가 됐으나 어머니는 치욕으로 생각,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 이런 와타나베가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의 폭소 끝에는 찝찌름한 뒷맛이 남는다.

연극 ‘사나이 와타나베, 완전히 삐지다’에는 코믹할 수밖에 없는 인물과 상황들이 있다. 이들의 어이없는 다툼은 독특한 우정을 만들어낸다. 외형적인 이질감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동질감이 작용한다. 와타나베는 누군가에게 살해되고 박만춘은 죽어가는 그가 있는 방 밖에서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박만춘은 색맹이다. 파란색과 지친 붉은색, 그리고 흐린 배경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와타나베는 붉은 피로 얼룩진 몸을 끌고 곧 바다로 간다. 시종일관 유쾌함의 종착점은 비극이다.

기주봉은 정말로 야쿠자 같았으며 정은표 역시 정말로 소심한 흥행 실패의 영화감독처럼 보였다. 일인다역의 김C는 선배, 집사, 게이샤, 살인자 등으로 모습을 바꾸며 관객에게 ‘충격’을 준 장본이기도 하다. 연기력으로 인정받아 온 두 배우와, 지저분한 것 싫어하고 밖에서 자는 것은 ‘되게’ 싫어하는 김C의 조화는 부조화 속 조화를 이뤘다. 아쉬운 점은 세 인물은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뤘으나 극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촘촘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구성은 엉성하게 조합돼있어 겉핥기에 그친다. 배우들의 마이크 착용은 대사의 효과적 전달보다는 어색함을 느끼게 했고 무엇보다 일차원적 유머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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