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은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 위로 동그란 웃음이 날기도 하고, 일그러진 표정 사이로 눈물이 흘러넘치기도 한다. 이 표정들 중에는 마주하기가 힘들어, 기억의 골방에 던져둔 것도 있다. 그 아픈 기억마저 새하얗게 덮을 수 있는, 고은 시인의 ‘눈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뮤지컬 ‘더 매지션스’는 그 던져진 아픈 기억마저, 사랑으로 치환시키는 마법이 있다.

- 열꽃이 핀 자리
조용한 울음을 안고 흐르는 강이 있다. 몸을 뒤척이는 물줄기마다 생채기가 가득하다. 뮤지컬 ‘더 매지션스(The Magicians)’의 등장인물들 역시 아픈 자리들이 있다.
이 극에서 관객은 ‘여린 내면’과 ‘왜소한 자아’를 만날 수 있다. 극중 ‘자은’은 아주 여리고 예민한 내면을 가졌다. 그녀는 ‘사과를 베어 먹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예민하다. ‘자은’의 복잡한 내면은 그녀가 읊조리는 ‘천 개의 불안, 하나의 희망’이라는 말로 대변되기도 한다. 그리고 고졸인 채로 음악을 하는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표현하는 ‘자은’을 통해 ‘왜소한 자아’ 또는 ‘자기부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은 ‘자은’의 불안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예술가적 기질이거나, ‘새엄마’라는 말을 통해 그녀가 자라온 환경을 유추해볼 따름이다. ‘자은’의 뚜렷한 이유 없는 불안은 우리시대 젊은이들의 내면 중 한 모습을 대변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 아래 ‘자아’를 발견하기 힘들었던 젊음들은 늦게까지 연장된 사춘기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 구심점을 잃어버리고, 파편화된 포스트 모던한 사회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마법사 밴드’의 멤버들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음악 밴드이면서 ‘오복마트’ CM송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만 하고 살았으면 할 정도로 음악 하는 시간에 충만함을 갖기도 한다. ‘명수’의 ‘특별하지 않아, 막 살지도 않아’, ‘기타에 미쳤어’라는 노래는 극의 초반부에 나온 노래이면서도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의 분위기를 풍기면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은 ‘자은’의 죽음 이후 밴드가 해체되면서 요원해지기만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손 굳은 살’이 베일 정도로 연습을 한다. 포기하지 못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사랑’에 관한 상처도 도사리고 있다. 왜소한 자아를 가진 ‘자은’은 남자친구 ‘재성’ 앞에서 자신이 없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재성’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넌 날 몰라’라며 소리친다. ‘내 안은 공허한 사랑’이란 극중 가사처럼, 자기를 사랑하지 못한 채 하는 타인과의 사랑은 공허하다.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모습 이면에,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서툰 모습도 있다. ‘명수’의 사랑은 밴드 멤버들이 다 알정도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뒤늦게 ‘하영’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 되살아나는 불씨, 기억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 된다
자아, 사랑, 음악이 불타고 있는 자리는 참으로 뜨겁다. 그 뜨거움을 잃어 버렸을 때, 열꽃 피었던 자리는 열과 대비되어 찬바람이 뼛속까지 분다. 그러한 마법사 밴드의 현재는 ‘자은’의 기일, 음악이란 매개체로 뜨거웠던 과거로 향한다. 당장이라도 데일 것 같이 아파서 골방에 던져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시간으로부터 조금이나마 거리를 둔 인물들은 과거와의 화해를 시작한다. 화한 숯내만 남긴 채 꺼져버린 줄 알았던 과거에서 그들은 불씨를 발견한다. 그 불씨를 통해 어긋나게 표현되었지만, 그 속에 가려진 진심들을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된다.

- 약방의 감초 스님
뮤지컬 ‘더 매지션스(The Magicians)’가 다루는 내용은 무겁다. 그럼에도 이 극에는 웃음이 둥글둥글 썰려 나온다. 전직 스노보드 선수였던 ‘스님’은 폭포수 같은 웃음을 자아낸다. ‘스님’이라는 위치가 가지는 경건함과 아시아적 느낌은 육포, 외제 맥주라는 세속성과 국외적 느낌과 대조를 이룬다. 관객은 높은 곳에 있던 기대감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신선함에 유쾌함을 느낀다.
‘스님’이 가진 위치감은 극의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고뇌하고, 갈구하는 젊음의 특성이 ‘수행자’라는 역과 잘 맞다. 또한 승복을 입은 그가 던지는 말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속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만든다. 스님이 삼은 화두 “처사님 조반을 다 드셨는지요? 그럼 바루를 닦으세요”를 관객은 되씹게 된다. 전직 스노보드 선수였던 그는 떠나간 사랑 때문에 얻은 제 키 만한 짐으로 상징되는 ‘보드’를 산장에 맡긴다. 그러나 바루를 통해 ‘떠나간 사랑을 비워라’는 깨달음을 통해 다시 스노보드를 찾으러 온다. 비움을 통해 다시 자기 짐을 안고, 하산할 용기를 얻는다. 스노보드는 산장이란 공간을 찾게 되는 계기이자, 하산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모든 역할이 그렇겠지만, ‘스님’역할도 배우에 따라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냈다. 김종원 배우가 표현한 ‘스님’은 웃음의 꽃잎이 밖으로 탁 터지듯 벌어졌다. 관객은 좀 더 신나게 웃을 수 있는 반면, 극의 전반이 ‘스님’이란 인물에 가려진 인상을 풍겼다. 반면 이선근 배우가 표현한 ‘스님’은 웃음꽃이 흐드러지되, 차분함이 웃음의 꽃잎을 안으로 살짝 말고 있는 듯했다. 김종원 씨가 표현한 ‘스님’만큼의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지만, 극 속에서 보다 잘 묻어났다.

- 극의 ‘시공간 전환’을 가늠하게 해주는 의상으로 변화
뮤지컬 ‘더 매지션스(The Magicians)’는 초연에 비해 많이 수정되고 있다. 스토리상 불필요한 부분이 빠지기도 하고, 대사가 수정되기도 한다. 초기 공연이 웃자란 나뭇가지를 같았다면, 거듭된 공연은 조금씩 가지치기를 통해 조금씩 정돈되는 나무 같다. 그리고 무대의상도 변화되었다.
초연에서 ‘자은’의 의상은 시종일관 검은색이었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극의 시공간의 전환이 무대의상에는 반영되지 않았었다. ‘자은’의 경우 그 시공간에 따라 영혼인 상태와 실제 인물인 상태로 나뉘기 때문에, 일관된 무대의상은 극에 대한 몰입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자은’의 의상은 영혼의 상태에서도 검은색에 흰색 천 장식이 들어 간 것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의상이 현재의 시공간에서는 주황색 계통으로 변화되었다. 이 주황색 계통의 천 크기는 극의 전개에 따라 변한다. ‘자은’이 남자친구인 ‘재성’과 사랑을 하는 부분에서, 주황색 계통의 옷은 상의 전체이다. 그러나 그녀가 죽음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이 천은 분홍색 머플러 정도로 줄어들었다. 머리모양도 초연 때는 시종일관 쇼트파마로 같았었다. 그러나 영혼의 상태에서는 쇼트마파로, 실제 인물인 상태에서는 레게파마로 수정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극의 전면의 몽환성은 초연에 비해 줄어든 느낌이다. 그러나 현실공간에서의 현실감은 더욱 부각 되었다. 자은의 영혼인 상태와 실제 인물인 상태가 구분되었다. 이것과 맞물린 극의 시공간의 전환에 대한 암시도 바뀐 의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뮤지컬 ‘더 매지션스(The Magicians)’의 시공간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입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작품 중후반부 플롯 길이와 높이가 적당하지 않았다. 지루하리라 만치 시간을 끌고 갔다. 물론 ‘기억하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치환하기 위해, 극의 상당 시간을 이 부분에 할애했을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빠른 극의 전개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극은 마법사 밴드 멤버 각자의 ‘과거와의 화해’를 이끌어 낸다. 그 중에서도 ‘자은’과 ‘하영’의 부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좀 더 한 곳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에 마법사 밴드의 멤버들과 관객이 ‘자은’이란 인물과 공감할 시간은 적었다. 관객은 ‘자은’의 죽음을 다소 건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관객은 ‘하영’의 ‘자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깊이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정은승 객원기자newstage@hanmail.net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