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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러지는 꽃 같이 애처로운 사랑이여, 뮤지컬 ‘아랑가’고전 설화를 우리 소리로 변주해 만든 깊은 울림

마치 소리와 색채가 가슴에 물을 들이는 것 같다. 한 폭의 수묵화에 부채와 손끝과 한복의 옷고름이 넘실거리는 춤사위가 더해져 그림이 되고, 판소리와 피아노, 기타와 대금이 묘한 배합으로 만나고 헤어지며 구슬픈 화음의 소리가 된다. 우리 소리의 설득력이 이토록 강했던가. 뮤지컬 ‘아랑가’는 서글프게 엇갈리는 사랑과 운명이라는 익숙한 서사를 마치 한의 정서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우리 소리로 변주해 깊은 정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소리와 몸짓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무대조차 여백의 미로 느껴진다. 서술자인 소리꾼 ‘도창’의 물음으로 막을 연 작품은 절절하게 애끓는 심정으로 치달아가는 개로에게 끊임없이 답을 요구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친숙한 서사 ‘도미설화’의 극적인 변주
- 길고 긴 삶에서 어찌 울지 않을 수 있는가

마을 뒷산에서 홀로 울고 있던 소년이 한 여인을 만났다. 모든 가혹한 운명은 그 찰나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또한 그 찰나로 어긋나버렸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끝났을 수도 있는 짧은 만남이었다. 만약 그 소년이 백제의 왕 개로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여인이 백제의 장군 도미의 아내가 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백제를 멸망하게 할 왕이 될 거라는 저주 속에서 왕위에 오른 개로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그 시절의 여인을 밤마다 꿈꾸며 사무치는 그리움에 앓게 된다. 백제가 고구려의 위협과 역적의 계략으로 기울어갈수록 어찌할지 모르겠는 외로운 이 사내는 유일한 자신의 편이 되어준 꿈속의 여인에 더더욱 집착할 뿐이다.

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오롯이 한 사람의 어깨에 짊어져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어찌 보면 가혹한 저주다. 장대한 역사에서 결국 나라의 흥망성쇠는 어쩌면 왕의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과 찰나의 충동에 따라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작품은 왕을 주인공으로 하되, 왕이라는 지위가 아닌 한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고뇌에 깊이 천착해 불완전한 인간의 내면에 공감하게 만든다. 인간에게 예측할 수 없는 삶은 허망하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은 가혹하며,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은 아름답기보다는 추악하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에서 무수히 방황하고 눈물짓는 인간들의 표정은 아름답고 눈부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은 욕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개로를 통해 이기적인 선택을 하여 나라를 파멸로 이끄는 왕에 대해 객석의 공감과 연민을 이끌어내는데 결국 성공한다. 그의 모습이 마치 져 버릴 것을 알면서도 피어나는 찰나의 꽃잎처럼 아름답고 처연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곳을 보는 세 인물의 폭발하는 감정선
- 박유덕, 최연우 배우의 애절한 표정과 몸짓

서사를 이끄는 중심에는 남편 도미에게 일편단심인 ‘아랑’과 그런 아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임금 ‘개로’의 엇갈리는 사랑이 있다. 여기에 고구려의 위협에 기울어가는 백제와 백성을 걱정하는 ‘도미’ 장군의 애끓는 충정이 부딪치면 서로 다른 곳을 보는 세 인물의 감정선은 폭발한다. 특히 극중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아랑가’는 남편 도미에게 부르는 아랑의 사랑가이자, 개로가 어릴 적 울고 있는 그에게 불러준 위로가였다는 점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보는 이에게 애틋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단순한 가사와 상황에 따라 기쁘게도 슬프게도 들리는 중독적인 가락이 노래가 끝나고도 귓가를 맴도는 긴 여운을 만들어낸다.

중심인물 개로를 맡은 박유덕 배우의 섬세하고 강렬한 감정연기는 작품의 서사와 주제가 설득력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자칫 잘못하면 개로는 여주인공 아랑과 충직한 신하 도미의 삶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원망을 얻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어야 했던 아픔과 왕위에 오르면서 받았던 저주로 인한 고통, 멈추려 했지만 도저히 멈출 길 없는 사랑의 감정을 몰입도 높게 표현해 객석을 충분히 눈물짓게 했다. 아랑을 맡은 최연우 배우 역시 맑은 음색과 고운 춤사위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아름다움을 선보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사랑스러우면서도 애처로운 운명의 여인을 연기해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생생한 그림 그려낸 ‘도창’의 판소리, 심금 울려
- 고구려 침략 장면의 극대화 ‘백제의 태양’

‘아랑가’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도창’의 판소리다. 우리 소리가 만들어내는 한의 정서는 초반부터 기구하고 애처로운 인물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하고, 때로는 인물을 부추기거나 장면의 전환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사건의 긴박함을 소리로 풀어내기도 했다. 특히 인상적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부분은 6장의 ‘백제의 태양’이다. ‘백제의 태양’은 판소리 특유의 매력과 장면의 극대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백제의 한 평민 부부가 혼인을 하는 흥겨운 장면 묘사를 신나게 노래하다가 갑자기 습격한 고구려 도적떼에 백성들이 참혹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몰아치듯 읊는데, 작창가 박인혜의 애처로운 노랫말과 한스러운 곡소리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기 충분하다.

닥치는 대로 백제사람 상투 잡고 멱살 잡고 치맛자락 휘어잡고 칼을 휘두르고 살을 쏘아대니, 앉아죽고 서서죽고 울다죽고 앗아져 죽고 찢어져 죽고, 전 부치던 아낙이며, 소리하던 광대며, 보리 한 줌 손에 쥐고 잘 살라던 구경꾼들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 난무하네. 엄마 따라 구경 왔던 어린 아이 하나는 엄마는 어디 두고 한 손에 떡을 쥐고 엄마 엄마 울다 죽고. 볼에 찍은 연지조차 마르지 않은 신부는 꽃신 한 짝 벗어두고 고구려 도적 칼에 죽은 서방님 얼굴 물끄러미 바라보다 우물로 달려들어 툭!  (6장 ‘백제의 태양’ 중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아쉬워
- 사랑에 눈 먼 이기적인 왕에 그친 ‘개로’

아름답고도 강렬한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던져지는 물음의 깊이에 비해 극중 서사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셋의 삼각관계에만 중점을 두다보니 중심인물 개로의 캐릭터도 사랑에 눈이 멀어 국운이 기우는 것도 개의치 않는 몰인정하고 이기적인 임금의 모습으로만 비춰질 염려가 있다.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질문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정성 있는 답변이 되려면 개로가 임금으로서 어떤 고뇌를 가지고 있었는지, 개인적인 욕망과 사회적인 지위 사이에서 어떤 고민과 갈등 끝에 아랑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좀 더 구체적인 서사로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싶다.

원작인 도미 설화에서 도미는 일개 평민이기에 개로왕이 평민의 아내인 아랑을 탐하는 행위는 지배 계층의 가혹한 착취행위이자 폭정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렇기에 아랑의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과 끝까지 눈 먼 도미를 따라가 고구려 땅으로 넘어가는 결단이 지배계층에 맞서는 하층민의 결연한 의지로도 해석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아랑가’에서 도미는 왕에게 직언을 하는 충직한 장군으로, 아랑을 장군의 아내로 설정함으로써 개로가 장군의 아내를 탐하는 개인적 행위가 마치 나라를 배신해 국운을 기울게 하는 행위로 느껴지게끔 각색됐다. 백제의 국가적 위기와 맞물리면서 사랑에 눈 먼 개로왕의 선택이 관객에게 극적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더욱 어리석게 느껴지고 마는 이유다. 한정된 서사가 사랑에 대한 답은 되겠지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답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던져진 질문만으로 서사는 확장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히 눈과 귀를 홀리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여타의 뮤지컬과는 다른 우리 소리와 우리 선을 느낄 수 있는 무대라는 점에서도 귀하고 특별하다. 주연 배우부터 조연 배우와 소리꾼 화자까지 모든 배우들의 열연과 호흡도 인상적인데다, 작품 초반에 형성한 한의 정서를 끝까지 무르익도록 이끌어가는 연출과 구성도 탁월하다. 이것이 사랑이야기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누구나 공감할 그 거역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에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져 버릴 것을 알면서 피는 꽃처럼, 어차피 고통일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눈을 뗄 수 없는 애처로운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_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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