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 춤도 예외는 아니다. 춤은 사람의 마음과 닮아있어 세월이 흐를수록 겸손해지며 성숙한다. 지난 20일과 21일 어느 불혹의 댄서가 스페인 세비야의 플라멩코를 서울 무대에 올렸다. 2009 SIDance 해외초청작인 이사벨 바욘 플라멩코 무용단의 <라 뿌에르따 아비에르따-열린 문>은 2007년 제14회 세비야 플라멩코 비엔날레에서 초연하자마자 최고 작품상을 수상하고 올해 2월 뉴욕 플라멩코 페스티벌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한 작품이다. 이 때문인지 양일간 공연임에도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은 많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 보니따(Bonita), 황홀한 솔로춤으로 가득 메운 무대

과연 전통 안달루시아 세비야파의 대표 댄서로 꼽힐만한 춤이었다. 바욘은 극장무대에 홀로 서있음에도 절도있으면서도 에로틱한 에너지를 발산하였다. 안달루시아 집시 뮤지션의 라이브 연주에 맞추어 팔과 허리, 엉덩이의 움직임은 물결치듯 요동쳤다. 암전된 극장에 단 하나의 핀 조명을 등불삼아, 근육의 마디 하나하나를 움직이는 모습에 연륜이 묻어났다.

‘열린 문’은 자유를 향해 열린 문, 즉 영감, 불가사의한 마력, 상상, 마법 등을 발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입구를 상징한다고 한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자 실제로 무대의 뒷부분은 반 쯤 열려있다. 드레스룸을 연상시키는 이 공간에서 바욘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뒤편으로 들어가 의상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장신구를 달았다. 칸테(Cante, 플라멩코 노래), 토케(Toque, 기타연주), 타악 연주는 끊이지 않았고 바욘의 몸짓에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손목을 돌리면서 물 흐르듯 팔을 움직이는 브라쎄오(Braceo) 동작과 바타 데 콜라(Bata de Cola, 긴 꼬리처럼 단을 길게 늘어뜨린 스커트)를 휘두르는 동작은 슬로우모션을 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꽤 무게가 나가는 스커트 자락을 자유자재로 펄럭거리며 유연한 상체 동작을 선보였다. 마치 투우사가 붉은 수건을 휘날리듯, 긴 스커트 자락과 숄을 활용하여 난도 높은 동작을 무리 없이 소화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 올레(Ole), 즐길 줄 아는 관객들과의 교감

안달루시아 집시 뮤지션의 기타, 타악, 구음은 스페인 어느 광장에 나와 있는 분위기를 선사했다. 강렬한 모래바람이 일어나듯 이국적인 음악이 공연장을 가득 메우자 관객들은 숨죽여 춤에 몰입할 수 있었다. 칸테의 소리가 너무 컸던 점을 제외하면 다른 연주들은 독특한 리듬감이 살아있어 흥을 돋우었다.

바욘과 뮤지션들은 손뼉을 쳐서 리듬을 맞추는 빨마스(Palmas) 동작을 유도하며 기존의 무용공연에서 볼 수 없었던 관객과의 조우를 시도했다. 이에 흥이 한층 오르자 바욘은 중지와 약지를 엄지에 대고 비껴서 소리를 내는 피토스(Pitos) 동작과 함께 현란한 싸빠떼아도(Zapateado)를 선보여 많은 갈채를 받았다. 올레!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플라멩코의 경지에 이른 예술혼을 두엔데(Duende)라고 한다. 자유분방한 정서에 휩싸여 신비롭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혹적 순간을 맞이하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불혹의 나이로 농익은 춤을 보여준 바욘의 무대를 통해 스페인춤의 두엔데를 맛볼 수 있었다. 두엔데 플라멩코!


홍애령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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