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0.11.27 금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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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에쿠우스’, 현대문명을 전복하는 야생마의 환영비정상을 열망하는 ‘욕망’의 정상성을 성찰하다

성자(聖者)와 어린아이는 닮았다. 광기는 사색을 닮았고, 인간의 이성이란 결국 욕망을 거세한 빈 허울일 뿐이다. 가식과 허울을 벗어던진 인간에게 남겨지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자유라는 깨달음. 연극 ‘에쿠우스’는 아주 거칠고 날이 선 원시적 돌칼로 우리를 인간답게, 어른답게, 현대문명인답게 만든다고 믿어 온 몇 겹의 그럴듯한 허울을 간단히 찢어발긴다. 어두운 밤, 전라로 에쿠우스의 등에 올라 벌판을 달리는 소년. 관객은 자신 안의 이성이 소년의 폭발하는 원시적 욕망에 감응하여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느낀다. ‘에쿠우스’가 공연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벌판을 가로지르는 야생마의 환영은 변함없이 강렬하게 객석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위선과 질서가 재갈 물린 문명의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일까.

‘나’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정상을 열망하는 ‘욕망’의 정상성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는 일곱 마리의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소년 알런의 심리 치료를 의뢰받는다. 다이사트는 알런의 숨겨진 이야기 속에서 금기를 뛰어넘고 일상의 질서를 재창조하는 ‘욕망’의 힘을 발견한다. 알런의 행위는 광기에 가까웠지만 일반인이 범접하기 힘든 순수한 열망이기도 했다. 다이사트는 알런에 감응해 악몽을 꾸기에 이른다. 가면을 쓴 채 아이들의 배를 가르고 제물로 바치며 다이사트는 꿈 속에서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을 느낀다. 알런의 얼굴을 한 ‘욕망’을 죽이는 행위에서 오는 저항감, 그리고 가면이 벗겨져 자신의 저항감이 타인에게 폭로되는 것에 대한 공포다. 과연 다이사트로 대변되는 현대인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욕망’을 억압하고 거세하는 문명의 폭력성일까, 이성의 가면을 벗고 마주할 내 ‘욕망’의 민낯일까. 다이사트라는 서술자를 통해 작품은 객석에 날선 질문을 던진다.

알런에게 에쿠우스는 말의 모습을 한 ‘신’이자 유일한 욕망의 분출구였다. 어린 소년은 견고한 질서로 통제된 양육환경에서 친구도 없고, TV보는 것도 금지되며, 강압적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와 종교적 광신도였던 어머니 아래서 자란다. 그의 눈앞에 해변가를 달리던 ‘말’은 억압된 욕망을 일제히 폭발시키는 강렬한 계기였을 뿐이다. ‘종교’라는 허락될 수 있는 창구를 통해 욕망의 수단을 얻는 데 성공한 소년. 자신의 신 에쿠우스와 함께 마음껏 벌판을 전라로 달리는 것만이 자신을 자신답게 만든다고 느낀다. 알런은 그렇게 ‘말’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열망’하는 기쁨을 얻고, 또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스스로를 구원한다. 관객은 알런을 치료의 대상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는 다이사트를 지켜보며, 비정상을 열망하는 인간 ‘욕망’의 정상성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알런은 왜 일곱 마리 말의 눈을 찔렀나?
원시적 세계, 잃어버린 감각의 강렬한 재현

연극 ‘에쿠우스’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전히 객석에 안겨주는 충격은 다른 무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원시적 감각의 전이 덕분이다. 무대 위 등장하는 일곱 마리의 말은 ‘언어’가 없이 ‘교감’이 가능했던 생생한 원시의 세계를 충실히 재현한다. 푸루루 하고 흩어지는 거친 호흡, 땅을 진동하게 하는 발굽과 꿈틀거리는 근육의 생동감, 언어 없이 야생의 음향이 폭발하며 객석은 그 세계에 압도된다. 그 원시성의 세계는 소리와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경험한 적 없는 그 세계에 느끼는 관객의 감각은 낯설음이 아닌 그리움에 가깝다. 인류가 후천적으로 습득한 문명의 때를 벗고 태초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 이런 감각이 일상적이지 않았을까. 단지 기이함이나 비현실성으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생동하는 육체의 향연은 마치 우리 인간의 내면에 깊게 숨겨졌던 육감을 깨우는 듯하다.

다이사트는 플라시보 효과와 최면을 이용해 그 원시 세계를 끌어내고, 이를 관객과 함께 목도한다. 초중반 알런의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추적자였던 다이사트는 후반부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간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돌진하는 그 열망을 거세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알런은 ‘질’이라는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발견하고는 ‘말’이라는 종교적 대상으로부터 욕망의 대상을 바꾸려고 한다. 말은 애초에 ‘종교’라는 창구를 통해 허락된 신적 존재였으므로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알런은 서서히 자신을 통제하려 하는 일곱 마리의 말의 눈을 과감히 찌름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욕망의 주체자가 되려고 한다.

소년 안의 열망을 ‘악마’로 규정하는 알런의 어머니나, 종교에 심취한 ‘광기’로 규정하는 알런의 아버지와 달리, 다이사트는 욕망의 주체자가 되려는 알런의 행위를 긍정한다. 열정이 식은 결혼 생활과 의사라는 직업에 얽매여 무력하게 살아 온 다이사트 앞에 소년의 순수한 열망은 눈부신 것이었다. 다이사트의 이러한 감상은 알런을 바라보는 객석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문명의 어둠에 익숙해져 정상적인 어른의 범주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그의 말대로 “어둠 속을 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해졌는지도 모른다. ‘정상’이라는 획일성이 우리의 욕망을 재단하는 폭력과 억압의 근원임을 다이사트는 자조적으로 폭로한다.

‘전박찬’의 알란, 그 눈빛의 소요와 적요
‘이양숙’의 도라, 말투와 태도의 기묘한 이중성

2열 중앙에서 마주한 ‘전박찬’ 배우의 알런은 마주보기 힘들면서도 피할 수도 없는 깊은 색채가 있었다. 꿈틀되는 욕망의 소요와 질서로부터 등 돌린 자의 고독한 적요가 동시에 침잠해 있는 그 눈빛. 볼이 움푹 패인 왜소한 몸집의 소년 같은 그가 내뿜는 에너지는 예상치 못한 완급 조절로 객석을 한껏 긴장시켰다. 무대 위의 그는 때론 사납고 도발적인, 때로는 보호본능을 일으킬 만큼 연약한 소년의 얼굴로 사회 질서를 대변하는 어른들의 위선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장두이’ 배우의 다이사트도 깊이가 있었지만 유독 눈에 띈 것은 ‘이양숙’ 배우의 도라 연기였다. 알런의 어머니인 도라는 극중 기독교에 심취한 광신도적인 성격을 가지는 인물로서, 일견 온순하고 얌전해보이는 주부의 모습이지만 그 이면에 강렬한 광기를 숨기고 있다. 이양숙 배우의 도라는 씹어뱉는 듯한 날선 말투를 정제된 태도와 동작 속에 드러냄으로써 관객이 그 기묘한 이중성을 포착하게 만들었다. 아들을 사랑하고 어머니로서 가정에 충실한 듯한 여성의 말에 숨겨진 그 불편한 위화감. 평범한 가정으로 위장된 알런 가족의 허상을 감지하게 하는 유효한 장치로 작용했다.

‘에쿠우스’에서 말이 되어 야생의 언어를 표현한 너제트 역 외의 코러스 배우들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그들의 내는 소리와 몸짓은 단순한 마임을 넘어서 무대를 하나의 원시 환상 세계로 바꾸어놓는 마법과도 같은 스위치다. 인간의 인간답지 않은 비일상적 연기가 가장 일상적으로 구현되는 무대. 숭배의 대상이라는 것이 충분히 납득될 만한 야성의 아름다움이 지켜보는 관객의 감각을 흔들어 깨운다. 보는 이조차 ‘에쿠우스!’를 외치며 그 갈기로 손을 뻗고 싶어지는 그 특별한 체험을, 현대인 안에 갇힌 욕망이 싹트려는 발현의 감각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남는 것은 두 개의 질문이다. 현대인은 문명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원시적인 인간의 욕망을 거세한 것일까, 아니면 현대 문명과 질서의 힘에 눌려 거세를 강요당한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시간의 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문명의 바퀴를 되돌릴 수 있지는 않을까. 원초적 욕망이 평화롭게 허용되는 원시 사회로의 복귀를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욕망을 되찾은 인간은 지금보다 행복해질까. 무대는 끝이 나지만 알런과 다이사트는 관객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갈등을 부추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완전한 삶의 주체자가 되기 위해 이 화두를 끝맺어야 할 때가 됐다. ‘에쿠우스’가 불붙인 ‘욕망’이라는 화두다.

사진 출처_나인스토리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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