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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위대한 찰나,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한 여성의 실존적 고민과 추억의 힘 서정적으로 담아내

시간이 특별해지면 그것은 공간으로 기억된다. 한 시골마을의 여자와 돌풍처럼 나타난 한 남자의 나흘간의 시간을 우리는 그들이 함께 한 둘 만의 공간으로 기억한다. 아이오와주의 한적한 시골마을, 로즈먼다리, 웃음소리가 섞여드는 부엌, 향기로운 식탁. 그리고 라디오가 흐르고 밤이 한층 짙어지던 실내. 비록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일지라도, 때로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순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렇게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아름다운 무대공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의 나흘간의 사랑을 마법처럼 한 장의 사진으로 각인시킨다.

‘나’로 살아가려는 한 여성의 ‘실존적’ 고민에 관한 이야기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프란체스카의 일생이 과거부터 미래까지 뚜렷이 조망된다는 점이다. 작품은 시작부터 홀로 프란체스카를 등장시켜 자신의 젊은 날과 고향 나폴리에서 미국 아이오와주로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한다. 그녀에게 고향이었던 나폴리는 아름다웠지만 전쟁과 이별 속에서 자유와 꿈을 잃어가는 고통의 세계이기도 했다. 꿈을 위해 선택한 아이오와의 세계에는 꿈은 없었지만 한 포기씩 심어서 길들이는 동안 가족과 이웃에게 애정과 신뢰라는 싹이 텄다. 그렇게 자신 역시 길들여간 낯선 땅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잊고,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며 아내와 엄마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나는 꿈꿨어 나만의 공간 자유로운 곳.
종이와 연필 푹신한 의자. 햇살 가득한 여길 떠나 벗어나는 그런 꿈."

"어쩜 그렇게 잊고 살았을까. 거울 본 적이 언제였나. 그저 무심히 맴돌았던 하루하루."

프란체스카의 잊혀졌던 꿈은 극의 초반 딸 캐롤린의 지나가는 볼멘소리로 복선처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태리에서 살지 그랬어. 엄만 농장도 스티비(황소)도 관심없잖아.” 예민한 딸은 엄마가 어딘가 영혼을 두고 온 사람처럼 아이오와주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 나폴리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체념하거나 애써 외면한 고향과 꿈에 대한 열망은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하는 드로잉북이나, 아이오와주에서는 아무도 심지 않는 나폴리의 식물을 심고 나폴리의 음식을 요리하는 일상에서 때때로 되살아난다.

남편은 프란체스카에게 자신이 보호해주고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일방적인 애정을 드러내지만, 로버트는 그 안에 숨겨진 그녀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낸다. 로버트는 “여자들한테 더 힘든 세상”이라고 말하며, “꿈이 사라진 엄마와 아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로버트의 말과 그의 작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프란체스카는 잃었던 꿈과 자유, 한 여자로서 살아가는 기쁨에 서서히 눈을 뜬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내민 꽃다발을 독초라고 놀리며 짓궂었던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고, 새 드레스를 고르며 그동안 자신을 얼마나 잊고 살았는지를 깨닫는다.

그림을 그리듯 감성을 수놓는 무대와 음악들

작품은 이러한 여주인공의 내면에 일어나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격렬한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하기 위해 여타의 대극장 뮤지컬과는 다른 연출들을 시도한다. 때로는 과감한 정적을 활용하고 때로는 여린 피아노의 선율만이 흐르며 관객이 주인공들의 내면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때때로 연극처럼 느껴진다. 특히 둘이 저녁을 함께 준비하는 장면에서 부엌에서 나누는 대화나 움직임, 요리하는 소리와 음식냄새들은 그 어떤 음악도 없이 둘 만의 공간을 견고하게 완성시킨다. 객석의 감각을 자극하며 설렘과 긴장 갈등과 흥분을 오가게 하는 그 섬세한 연출은 어떤 화려함이나 장치에 기대지 않고도 장면을 영화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보이게 만든다.

해질 무렵의 아름다운 로즈먼 다리와 사진에 열중한 남자, 그리고 프란체스카의 옆모습은 영화를 통해 관객의 머릿속에 이미 기억된 강렬한 장면이다. 작품은 이를 최대한 성실히 재현하면서도 생략과 멈춤, 셔터를 누르는 소리와 무대전체를 번쩍이는 커다한 프레임으로 변주해 인상적인 한 장의 새로운 사진을 남긴다. 특히, 둘이 처음 만나 로즈먼 다리로 이동하는 순간의 설렘을 트럭의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푸른 들판의 영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일렁이며 점차 번져가는 차창 밖의 영상이 마치 두 남녀가 현실 세계를 떠난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해 서정적인 감성에 흠뻑 젖게 만들었다.

박은태-김선영, 연극적인 호흡과 섬세한 내면 연기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동명 영화의 두 주연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대중에게 각인된 존재감은 강력하다. 하지만 뮤지컬화 된 작품 속 두 배우는 영화 속 캐릭터를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영화보다 강화된 서사를 통해 각자의 캐릭터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로버트 역의 박은태 배우는 특유의 보기 좋은 중저음을 활용해 젠틀하면서도 섬세한 중년남자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혼자의 세계에 갇혀 살았던 떠돌이로서의 고독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프란체스카 역의 김선영 배우 역시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섬세한 내면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김선영 배우는 고음에도 탁월한 가창력을 가졌지만 작품은 그녀의 내면에 집중하기 위해 강한 고음보다는 읊조리는 듯한 호흡과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 흐르는 듯한 감정 표현에 중점에 두는 노래를 선택했다. 대극장 뮤지컬에서 화려한 안무나 강렬한 고음에 기대지 않고 인물의 내면을 담담히 드러낸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감정선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두 배우의 연극적인 호흡을 살린 열연의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건성이나 갈등이 적은 비교적 단조로운 서사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영화와 다르게 삽입된 가족들의 박람회에서의 모습이나, 프란체스카 혹은 로버트의 회상신에서 등장하는 조연들의 퍼포먼스다. 이런 개입 혹은 난입이 때때로 둘의 감정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2막 후반부에서 아이들의 성장과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는 대목을 프란체스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돌아보는 넘버가 삽입되면서 서사의 결이 다른 듯한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조연의 적절한 등장이 반가웠던 대목은 이웃집에 사는 찰리와 마지 부부의 신이었다. 금지된 사랑을 소재로 한 만큼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분위기를 유쾌하게 풀어주면서도 둘의 사랑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각을 자연스럽게 전달함으로써 주연이 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누구나 사랑의 시작과 과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안타까운 추억으로 남아버린 사랑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서로 어딘가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를 지켜보는 객석의 마음은 감미롭지만 애처롭고, 애절한 만큼 안타깝다. 하지만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는 단지 사랑과 이별에 대한 기록은 아니다. 불륜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작품이 담아내는 것은 엄마나 아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고 싶은 여성의 실존적인 고민이자, 평생 동안을 버티고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는 위대한 추억의 힘이다. 이는 우리가 살면서 한번쯤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싶은 보석 같은 순간이다. 이 이야기가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닫는, 인생 전체에서 가장 파워풀하고 극적인 찰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 제공_쇼노트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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