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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원형중심에 광대가 있다 -3

 

광대를 아십니까
장길산은 누구인③


이익의 표현대로 우리나라와 같이 한정된 지경(地境)에서 도둑은 새장 속의 새와 같고 물동이 속의 고기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장길산이 10년 넘게 도적으로 활동했으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는, 국사학자 정석종의 지적대로, 그가 당대의 민중들 편에서 활동하여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는 지배층의 위선과 무능력이 노정되어 일반 민중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부각되는 시대였다. 장길산이 도적으로서, 그것도 광대 계통의 도적으로서 광범위한 관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공공연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새로운 사회를 소망하고 있던 수많은 일반 민중의 지지가 없이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둘째는 장길산 집단은 평소에는 마상(馬商)과 같은 상업활동을 하였다는 점이다. 경기 이북의 광대는, 평소에는 굿판에서 악기반주 등을 하는 경기 이남의 광대와 달리 체, 바디 등을 만드는 수공업을 하였고, 이를 내다파는 과정에서 상업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경기 이북 광대의 상업활동과 일정하게 관계되는 장길산 집단의 마상 활동은 그 집단이 약탈하지 않고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셋째, 장길산이 창우 곧 광대이고, 장길산 집단이 ‘극적’(劇敵) 곧 연극을 하는 광대 계통의 도적들이며, 이영창도 장길산 집단의 사람들을 만난 것에 대해 첫째 광대, 둘째 광대, 셋째 광대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장길산 집단은 광대들이 중심이 된 집단이 분명하다. 실제로도 근대 무렵까지도 일반 평민은 광대집단 사람들에게 반말을 하는 등 일반 평민과 광대는 신분상의 격차가 컸기에 당시 일반 평민이 장길산 집단에 들어가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렇게 장길산 집단이 대부분 광대들이었다는 것은 이들이 엄청난 전투력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음에 보듯 1894년 동학혁명 때도 전라도에서는 동학군에서든 관군에서든 그 정예 병력은 무부(巫夫) 곧 광대들이었다.
“처음에 김개남은 도내의 창우․재인 천여 명으로 일군(一軍)을 만들어 그들을 두터이 예우해서 그들의 사력(死力)을 얻음으로써 도모할 수 있었다.” 황현, ‘오하기문’
“부관 이재섭과 동 송봉호 등이 1천명의 병정을 거느리고 고부(古阜)로 행군령을 놓았다. 당시 새로 뽑은 병정은 모두 무부(巫夫) 출신이라 본래 몸이 날래고 불질을 잘하는 자들이며 신교련을 배워 비호같이 무서운 군사라고 칭하였다.” 오지영, ‘동학사’
광대들은 줄타기, 땅재주 등의 기예로 몸이 날래고 또 눈치도 빨랐기에 이들로 이루어진 부대는 그 전투력이 단연 남달랐던 것이다.
넷째, 경기 이북의 광대들은 재인촌과 같은 특수 마을에서 서로 혈연적으로 겹겹이 얽혀 살고있었다. 경기 이북의 광대들은 근대 무렵까지도 일반 평민들이 사는 마을들과는 다른 재인촌이라 불린 별도의 마을들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들 광대들은 자기들끼리만 결혼을 했기에 그들은 사돈, 겹사돈, 겹겹사돈 식으로 혼인 관계로 중층적으로 얽혀있었다. 신분 사회였던 조선시대까지도 엄연히 있었던 계급내혼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재인촌이란 특수 마을들에 살며 오랜 계급내혼의 결과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혈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이들 경기 이북의 광대집단에서 광대 출신 도적 장길산을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당시 일반 민중들을 수탈하며 무너져가고 있던 중세 사회를 그래도 지켜보고자 했던 관군들은 끝내 장길산을 잡지 못했다. 장길산은 우리나라에서 결코 잡히지 않은 유일한 유명한 도적이 된 것이다.



※ 비엠뉴스가(Bmnews)가 뉴스테이지(Newstage)로 2007년 7월 23일 개편되었습니다. 본 기사는 비엠뉴스(Bmnews)의 2006년 11월 20일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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