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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원형중심에 광대가 있다 -1

 

손태도
- 무형문화재 문화재전문위원

광대를 아십니까
장길산은 누구인가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조선의 3대 도둑으로 연산군 때의 홍길동,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을 들었다. 이들은 각기 나름대로 흥미로운 행적들을 남겼는데, 이중에서도 장길산은 그 신분이 광대라는 것과 끝내 잡히지 않았다는 것에 의해 우리들에게 남다른 흥미를 준다. 홍길동은 잡혔다가 탈출해서 국내를 떠나 일본 유구(琉球)로 가게 된다. 임꺽정은 잡혀 죽었다. 그러나 장길산은 10년 이상을 행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듯하다.
장길산이 창우 곧 광대 출신이란 것은 여러 문헌들에서 확인된다.
“극적(劇敵)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 없다.”(숙종실록)
“길산은 본래 창우로서 곤두박질을 잘하고 용맹하고 민첩한 것이 보통이 넘어 드디어 우두머리가 되었다.”(성호사설)
그런데 그가 활동한 지역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지역이기에 그는 경기 이북 지역 광대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광대’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민속 연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 명칭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신분제가 유지된 전통 사회에서는 어떤 특정한 일들은 특정한 신분의 사람들이 담당하였다. ‘광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광대의 역을 공식적으로 담당한 광대 신분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 광대들은 다음에 보듯, 신분 제도가 철폐된 1894년 갑오경장 때에 와서야 비로소 ‘창우’ 곧 ‘광대’ 신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역졸(驛卒), 창우(倡優), 백정들에게 모두 천인의 신분을 면해 줄 일.”(고종 실록)
이들 광대 신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고려 중기부터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세습되었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과거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토지조차 가질 수 없었다. 이들은 오직 광대 노릇과 같은 민속 예능을 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광대들은 경기 이남과 경기 이북이 그 상황이 조금 달랐다.
경기 이남의 경우에는 무당 집안의 남자들이 광대가 되었다. 반면 경기 이북의 경우에는 재인촌 혹은 광대촌이라 불린 특수 마을에 살던 남자들이 광대가 되었다. 그래서 경기 이남의 광대들은 광대 노릇을 하는 것 외에 평소에는 무부(巫夫)로서 굿판에서 악기 반주 등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 경기 이북의 광대들은 무속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에 평소에는 굿판에서도 활동할 수 있었던 경기 이남의 광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경기 이남의 광대들과 달리 체나 바디 등의 수공업품을 만들기도 했다. 장길산이 천여 명의 보병 외에도 유사시에는 기마 부대로 활용하고 평소에는 마상(馬商)으로 활동했던 부하들을 5천 명 정도나 갖고 있었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기마 부대 중심이었던 것은 이러한 경기 이북 광대들의 수공업품의 제작과 판매를 통한 상업 활동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다.
경기 이북의 광대들이 살았던 경기 이북의 재인촌들은 근대 무렵까지도 경기 이북의 군(郡)단위들에 하나 정도 꼴로 있었다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 이북의 재인촌 출신으로 이후 남한에서도 활동한 사람은 봉산 탈춤의 피리 악사이며 탈제작자로 지정된 박동신, 역시 봉산 탈춤의 말뚝이역과 취발이역 보유자로 지정된 최경명, 은율 탈춤의 악사로 지정된 김영택 등이 있었다. 이중 박동신과 최경명은 자신들이 재인촌 출신 사람들이란 것을 끝내 숨겼고, 김영택은 말년에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김영택이 아니었다면 경기 이북의 광대 집단이었던 재인촌 사람들에 대한 사실들은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다.




※ 비엠뉴스가(Bmnews)가 뉴스테이지(Newstage)로 2007년 7월 23일 개편되었습니다. 본 기사는 비엠뉴스(Bmnews)의 2006년 11월 16일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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