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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만추’…사랑은 흐르지 않는다, 머문다

▲연극 '만추' 공연장면_HJ컬쳐(주) 제공

사랑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흐를 수가 없다. 만추는 흐를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3포 세대, 할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일 뿐

연애, 결혼, 출산.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세 가지이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청년들을 일컬어 이 세 가지를 포기한 ‘3포 세대’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회의 급박한 변혁 속에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그 거대한 담론 속에서 도태당하거나 휘말리지 않으려면 사랑과 같은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되어야 하는 부수적인 개념으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날 젊은이들 앞에 놓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각박한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청년들이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와 소통하는 일이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사소함이 바로 그것이다. 무한 경쟁시대에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사랑이며 이것은 무엇이든 경제 가치로 환원되는 현대사회의 급박함 속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마지막 ‘순수’라고 규정해도 지나침이 없는 가치이다.

그러나 너무나 빠른 시간 흐름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는 그저 빠르게 ‘흐른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처럼 감정도 물살처럼 흘러버리는 것이다. SNS 등의 통신 매체를 통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청춘 남녀들이 늘고 있지만 이전보다 미혼 남녀의 비율 또한 늘어난 현상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삶의 유일한 위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회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청춘이 넘쳐나는 것이다.

▲연극 '만추' 공연장면_HJ컬쳐(주) 제공

어떻게 사랑하는 건지 잘 봐
 
사랑할 시간이 부족하지만 사랑해야만 버틸 수 있는 오늘의 청춘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 있다. 2011년 현빈, 탕웨이 주연의 영화 ‘만추’의 텍스트를 통해 다시 태어난 연극 ‘만추’가 바로 그것이다. 

애나는 어긋나버린 사랑의 끝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어버린 결혼과 남편의 폭력으로 점철된 결혼 생활의 끝자락에 폭력으로부터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렇게 살인죄로 감옥에 수감된 애나는 어머니의 부고로 인해 허락된 72간의 어귀에서 우연히 훈을 만난다. 훈은 돈 많은 아줌마들에게 몸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떠돌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제약과 시간의 빠른 조류 속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의 모습은 사랑할 시간이 부족한 오늘의 청춘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물리적인 측면으로 보아서는 이들은 가장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그 만큼 이들에게는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빠르게’ 사랑해야 할 상황에 놓여있는 훈과 애나는 ‘가장 느리게’ 사랑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훈과 애나의 베드신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매일 여자를 상대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훈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애나에게만은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직접 채워주며 훗날을 기약하는 장면이 그런 장면의 자리들을 채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채워주는 훈의 행동은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런 어처구니 없는 클리셰는 훈에게 애나가 흔해 빠진 여자 손님 중 하나가 아닐 것이라는 의미심장함을 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며 유의미하다.

▲연극 '만추' 공연장면_HJ컬쳐(주) 제공

수직적 동선을 통해 부각된 감정의 리드미컬

실제로 두 인물의 인생에서 기다림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이들의 사랑을 격정적이고 자극적으로 그리지 않았고, 그래서 이들이 보여주는 감정 교류의 속도 또한 절대 빠르지 않다. 인물의 감정 완급은 수직적 동선을 통해 가장 두드러진다. 수직적 동선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유인은 이러한 동선에 맞게 디자인된 무대미술의 공이 크다. 아래층과 윗 층에 연기 공간을 따로 만들고 배우들이 이 공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연기를 펼치도록 세트를 장치했기 때문이다.

애나가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이나 기억을 되짚어가는 장면들에서는 인물들의 동선이 수평적이며 층 이동이 거의 없다. 이런 장면들은 감정의 표현보다는 정보 전달에 그 목적을 둔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훈과 애나가 등장하는 장면들에서는 인물들이 아래층과 윗 층의 연기공간을 종횡무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애나와 훈이 기차를 타고 시애틀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인물들이 연기를 할 때 두 층을 동시에 활용하도록 연출한 것은 극 내부의 시간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연극에서 공연되는 실제시간을 늘리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인물이 윗 층으로 이동하는 동안 상대 인물도 이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관객들도 인물의 이동을 지켜보며 다음 장면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극 내부에서 인물이 경험하는 시간을 관객도 동시에 경험함으로써 관객이 인물의 감정선에 보다 잘 이입되도록 만든 연출적 시도라 볼 수 있다. 즉, 이는 배우들이 펼치는 감정선의 완급 조절을 시간성과 결합시킨 장치이며, 수단으로는 동선을 활용했고 이를 돕기 위해 무대는 수직적으로 디자인 된 것으로 분석 가능하다.

▲연극 '만추'의 배우 이명행_HJ컬쳐(주) 제공

배우 이명행을 두고 연극계의 현빈이라 소개하지 말라


이 작품은 일명 ‘느린 사랑’이야기이다. 그래서 훈과 애나를 연기하는 배우들 역시 느리고 정적인 사랑의 감정을 연기해야 한다. 이러한 감정을 연기하는 일은 적극적이고 빠른 감정을 표출하는 일보다 어렵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영화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이고, 영화에서 현빈과 탕웨이라는 톱스타가 등장했기 때문에 인물의 이미지가 톱 배우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상징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다.

그런데 훈 역할의 이명행 배우는 이번 무대에서 ‘현빈이 연기하는 훈’이 아닌 안쓰러운 남자 ‘훈’으로 등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 이명행의 대표작인 연극 ‘푸르른 날에’ 에서 보여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선생 ‘민호’를 좋아했던 이명행의 팬들은 이번 작품 만추에서 보여준 배우 이명행의 변신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이명행의 ‘댄디함‘은 이번 무대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만약 연출자가 배우 현빈의 이미지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배우를 캐스팅했거나, 훈 역할 배우에게 ’현빈스럽도록‘ 연기하라는 주문을 했거나, 이명행에게 ’현빈스러운‘ 연기를 하라고 주문했다면 어떠했을까? 혹은 배우 이명행을 캐스팅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랬다면 오늘날 관객들이 느끼는 훈이라는 인물의 두각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방인으로써 불안정한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훈이라는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불균형, 거기서 나오는 야성미, 그리고 거친 성향과 공존하는 측은함이 이명행이 완성한 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이명행에게 반한 것이 아니라 훈에게 반하게 된다. 그래서 훈을 연기한 이명행은 다음 작품에서 또 어떤 인물로 관객을 사로잡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배우이다. 

▲연극 '만추' 공연장면_HJ컬쳐(주) 제공

만추, ‘늦은 사랑’이 가진 두 가지 의미

가을에는 유난히 사랑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가을에 사랑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을과 치환되어 이 둘이 서로 상징화 된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라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선후 관계야 어찌되었든 ‘늦은 가을’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이 작품 제목의 맥락적 의미를 살펴본다면 ‘늦은 사랑’이라는 의미 정도로 해석 가능하다.

연극 ‘만추’가 사랑하기에 시간이 부족한 남녀 앞에 놓인 가혹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랑 자체가 늦었다는 의미로 해석 되겠지만 빠르고 가벼운 인스턴트식 사랑이 아니라 느리고 깊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의미로 해석도 가능하다. 따라서 작품의 제목인 ‘만추’가 가진 의미는 이중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물들의 감정 완급선을 시간의 완급을 통해 잘 녹여낸 이 작품은 기다림이 싫어서 사랑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거나, 시간이 없어서 사랑할 수 없다고 억지를 쓰는 오늘날의 안타까운 청춘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나여랑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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