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대가 있다. ‘세트가 좋았다’, ‘음악이 좋았다’, ‘배우가 잘 하더라’ 등으로 소회할 수 있는 작품도 있고, 주제나 텍스트를 추켜세울 만한 작품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난처한 무대도 있게 마련이다.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푸른 눈 박연’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뮤지컬 ‘푸른 눈 박연’은 곱다. 거창한 주제나 해외 라이선스 대작뮤지컬 같은 화려함은 덜하지만, 보면 으레 미소가 지어진다. 무대는 가슴 따뜻한 인정으로 가득하다. 밀려든 추위도 이길 듯한 든든한 훈기가 있다. 서정적인 음악과 종합예술을 더해놓은 무대는 경쾌하고 사랑스럽다.

‘곱.다! 곱.다!’

가무극 ‘푸른 눈 박연’은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시리즈’ 세 번째 무대다.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이하 벨테브레)가 조선인 ‘박연’이 되어가는 과정을 인정 넘치는 이야기와 역동적인 춤, 서정적인 음악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벨테브레’는 동인도 회사 소속으로 오랫동안 해적 생활을 했던 실제 인물이다. 조선 땅에 표류한 뒤 조선 여인과 결혼했고, 병자호란에서는 군인으로 활약했다. 작품은 26년 후에 ‘하멜’이 표류했을 때, 그가 왜 달아나지 않았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벨테브레’는 거칠고 외로운 바다에서 난파돼 맥없이 조선 땅으로 떨어진다. 그는 한양으로 끌려가 인조를 만나게 되고, 인조는 그가 포(抛)를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벨테브레’는 ‘박연’이란 이름을 하사받는다. 그는 연리와 덕구의 집에 머물며 따뜻한 조선 사람들의 인정에 천천히 물들어 간다.

가무극 ‘푸른 눈 박연’의 이야기는 실화다. 하지만 작품은 단순한 실화의 궤적을 밟지 않는다. 오히려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을 마음먹는다. 실화의 거대한 줄거리는 따르되 연리와 덕구, 덕만 등의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해 한층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박연은 오랫동안 바다 생활을 한 선원이다. 고독에 절여진 그에게 조선 사람들은 온돌방의 온기처럼 스르륵 스며든다. 호된 신고식을 치렀던 ‘훈련도감’의 선임들은 막걸리 한 잔으로 하루 시름을 더는 동료로, 동네 바보 덕구는 친형제 못지않은 가족으로, 당돌한 여인 연리는 어느 새 가슴 떨리게 하는 여인으로 그를 감싸 안는다.

작품의 전반에는 ‘인간애’가 넘실거린다. 박연은 주모의 애정 어린 구박(?)과 이웃의 스스럼없는 정(情)에 녹아들고, 바보 덕구가 외치는 ‘감자’, ‘곱다’ 등의 단어와 구성진 욕까지 깨친다. 그 과정도 즐겁지만, 서양과 동양의 풍습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도 유쾌함을 부른다. 상처에 똥물을 바르려는 주모에 기겁하고, 감사의 인사로 인조와 주모의 볼에 뽀뽀를 해대는 박연은 귀엽기까지 하다. 허물없이 조선인과 어우러지는 그의 모습은 ‘맘 붙이고, 발붙이고 살면 살 만하다’는 느긋한 희망을 관객의 가슴 한 켠에 심어준다.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한국인 내면의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종합예술의 즐거움을 준 무대

무대는 서라운드 리얼스크린으로 입체적인 자연 풍광을 그려낸다. 무대 위에 덧입혀진 영상은 넓은 무대를 조선의 땅으로, 거센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순식간에 바꿔낸다. 판화 기법의 하나인 에칭 기법을 활용한 영상은 그림과 실물의 경계에서 효과적인 무대 구현을 해냈다.

음악은 장중함과 아기자기함을 오간다. 덕구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노래 ‘곱다’를 비롯해 연리, 덕구, 박연이 부르는 ‘술래잡기’, ‘경사났네, 경사났어’ 등의 음악은 절로 흥을 부른다. 중독성도 있어 입가에 착착 감긴다. 반면 전 캐스트가 부르는 ‘길 잃은 방랑자들’은 장중함으로 객석을 휘어잡는다.

음악에 색동옷을 입힌 것은 안무다. 손미정과 박경수, 두 안무가는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협업을 통해 현대적이고도 한국적인 춤사위를 만들어냈다. 덕구가 부르는 ‘곱다’ 넘버에서 등장하는 서울예술단의 여성 군무는 한 무리의 나비처럼 곱다. 나풀대는 흰 천 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선녀가 강림한 듯 유연했다. 박연과 연리의 결혼식은 단연 작품의 명장면이다. ‘5기통 춤’을 연상케 하는 통통 튀어 오르는 춤과 네덜란드 민속춤을 변형한 발재간이 화려한 춤도 인상적이다.

믿음직한 서울예술단 배우들

박연 역으로 나선 배우 이시후는 서울예술단의 6년차 단원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서울예술단 입단 후 첫 주역을 맡았다. 이시후는 흔들림 없는 연기와 가창력으로 새로운 ‘서울예술단 스타 탄생’을 알렸다. 서울예술단 동료인 김혜원, 박영수와의 호흡도 밀도가 높아 관객의 집중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연리 역의 김혜원은 제 역처럼 소화했다. 발랄하면서도 당찬 연리는 시나브로 박연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이다. 김혜원은 깨끗한 목소리와 구성진 사투리로 어여쁜 연리를 만들어냈다. 덕구 역의 박영수는 ‘동네 바보’의 매력을 십분 살려냈다. 덕구는 극 전체의 중요한 장치이자 동시에 환기구다. 박영수는 시종일관 무대를 뛰어다니며 ‘감자’, ‘곱다’를 외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가창력과 특유의 생명력으로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서울예술단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