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유쾌하고 관능적인 수업이 또 있을까. 연극 ‘히스토리보이즈’는 공연 내내 매혹적 지식과 지적인 유머, 날 선 풍자들을 쉴 틈 없이 쏟아낸다. 작가 ‘앨런 베넷’은 작품 곳곳에서 ‘인생 수업’과 ‘스타 강사’의 면모를 넘나들며 도발적인 지성과 능수능란한 유머를 터트린다. 연출가와 배우들은 관능적인 텍스트에 톡톡 튀는 생기를 더해 작품의 색을 덧칠한다. 연극치고는 꽤 긴 3시간의 러닝타임도 ‘수업’의 몰입과 동시에 훅하고 지나가 버린다.

연극 ‘히스토리보이즈’는 2004년 영국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1980년대 영국 공립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옥스브릿지(옥스포드+캠브리지)에 가기 위해 모인 여덟 명의 영재반 학생들과 전혀 다른 수업 방식을 가진 선생님들 간의 관계를 그린다. 학생들은 인생을 위한 수업을 들려주는 헥터와 시험을 위한 수업 방식을 선택하는 어윈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쿨하고 직선적이지만 유연한 ‘인생 수업’

연극 ‘히스토리보이즈’의 줄거리만 들으면 얼핏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른다. 엘리트 학생들에게 시험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교사가 등장하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연극 ‘히스토리보이즈’는 더 ‘쿨하고 직선적’이다. ‘학교’와 ‘교육’에 대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무대 위는 모든 문제를 터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토론의 장’이 마련된다.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사고방식과 교육 방식, 역사적 시각을 치열하게 뱉어내고, 이들의 사고는 수도 없이 충돌한다. 작품은 이 모든 복잡한 의견 사이에서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을 유지한다. 결국, 이 모든 지성을 선택하고 사고하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유연하게 넘겨진다.

연극 ‘히스토리보이즈’에는 각기 다른 모습의 교사가 등장한다. 교사 헥터는 학생들에게 시험이 아닌 인생을 즐기기 위한 지식을 가르친다. 반면 학생들을 오토바이 뒤에 태운 채 성기를 몰래 더듬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시험을 위해 고용된 교사 어윈은 냉소적이고 현실적이다. 학생들에게 ‘옥스브리지’ 합격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지만 학력을 위조하고, 동성인 제자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여교사인 린톳 역시 역사를 이해하는 확고한 시선을 갖고 있지만, 자신과는 다른 시점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이들은 모두 ‘인간적인 모순’을 가진 인물들이다. ‘완벽함’으로 그려지던 ‘교사’의 이미지를 거침없이 무너뜨린다. “교사도 인간”이라는 극중 대사가 콕 와 닿는 순간이다. 학생들의 캐릭터도 다양함 그 자체다. 교장의 여비서와 만나고 있으면서도 어윈에게 관심을 갖는 데이킨이나, 수줍은 소년이지만 때로는 거침없는 언변을 터트리는 포스너, 스포츠 소년이지만 옥스퍼드에 꼭 들어가고 싶어 하는 럿지 등 각양각색이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며, 반항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선택한다. 연극 속 학생들도 자신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통해 스스로를 정립해 나간다. 이런 면에서 연극 ‘히스토리보이즈’는 완성되지 않은 인간들의 치열한 ‘성장기’를 담고 있다.

어렵다고? 그냥 즐겨도 좋다!

연극 ‘히스토리보이즈’는 그야말로 ‘지식의 향연’이다. 셰익스피어, A.E 하우스만, 필립 라킨, W.H 오든 등의 시인은 물론 더글라스 헤이글, 헨리 8세 등의 역사적 인물, 홀로코스트 등의 역사적 사건도 등장한다. 토론과 수업 장면이 많아 지적이고 관념적인 대사들도 자주 언급된다.

헥터와 어윈 두 교사의 수업은 완벽하게 이해하긴 어려워도 영국신사의 매혹적인 악센트를 듣는 것처럼 귀를 쫑긋하게 만든다. 연출가 김태형은 “토론과 수업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셰익스피어, 1차 세계대전, 햄릿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는데 부담을 느꼈다. 이러한 말들이 관객에게 생소하고 단순한 사변처럼 들릴 수도 있지 않나. 이러한 단어들을 단순한 지식으로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생각’을 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연극 ‘히스토리보이즈’는 지식을 파고들어도 재미있지만, 몰라도 재미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연출가 김태형은 짜임새 있는 드라마 구성으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줄 수 있게 했다. 각기 개성이 다른 선생님들 사이에서 학생들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도 관전 포인트다. 또한, 학생들의 톡톡 튀는 대화나 학생들이 과거 영화를 흉내 내며 맞추는 게임 장면,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 불어로 연극을 하는 장면 등은 공연을 보는 또 다른 재미다.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과 젊은 배우들의 호연

연극 ‘히스토리보이즈’는 텍스트의 표현력이 중요한 만큼 배우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배우 최용민은 가장 연장자이지만 극중 학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연륜은 느껴지지만 권위적이진 않아 푸근하고 따뜻한 헥터 역에 적격이었다. 냉소적이고 소심한 교사 어윈 역은 배우 이명행이 맡았다. 연극 ‘뜨거운 바다’, ‘푸르른 날에’에서 강렬한 연기를 보여준 이명행은 이번 공연을 통해 절제력과 저돌적인 매력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연기했다. 특히, 데이킨과 포스너 두 학생과의 대립 장면에서는 공기가 압축된 풍선처럼 곧 터질 듯 긴장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여교사 린톳 역을 맡은 추정화는 ‘돌직구 대사’를 자신만의 연기로 소화해 관객들을 웃음과 공감 속으로 끌어들였다.

영재반 학생 역을 맡은 젊은 여덟 배우의 호연도 인상적이다. 스크립스 역의 안재영은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연기 중심을 잡아줬다. 수줍고 여린 유태인 소년 포스너 역의 이재균은 본인과 잘 어울리는 캐릭터 연기와 맑은 미성이 어우러지는 샹송으로 관객의 눈과 귀를 동시에 즐겁게 했다. 모든 이의 주목을 받는 데이킨 역의 김찬호는 자신감 넘치는 연기로 눈길을 사로잡았으나 캐릭터의 매력을 부여하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럿지 역의 임준식, 락우드 역의 박성훈, 악타 역의 강기둥, 팀스 역의 황호진, 크라우더 역의 이형훈이 깔끔하고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정지혜 기자_사진 박민희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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