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부와 명성으로 얻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많은 것을 가진 자들도 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것일까. ‘막심 드 윈터’는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의 부를 가진 귀족 남자다. 훤칠한 외모에 고급스러운 옷, 대 저택에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산다. 충성스러운 하인들이 늘 함께하지만, 그의 주변엔 항상 어두운 기운이 감돈다.

절망 속에서 지켜야만 하는 부와 명성

막심은 아름다운 아내 레베카를 의문의 사고로 잃었다. 그는 외롭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아픔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가 사는 맨덜리의 대저택은 아름답지만 음산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죽은 레베카가 마치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맨덜리의 모든 것은 여전히 레베카에게 깊게 물들어 있다. 집사 댄버스 부인은 검정 옷을 입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맨덜리를 휘두르려고 한다. 그는 맨덜리를 벗어날 수 없다. 맨덜리의 명성을 지키는 일이 막심 인생의 전부다. 하지만 그가 맨덜리에 살고 있는 이상, 짙은 보랏빛 그림자의 레베카는 언제나 그의 주위를 맴돈다. 

막심이 그토록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레베카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력함’이다. 막심은 레베카의 물건들도, 레베카에 집착하는 집사 댄버스 부인도 버릴 수가 없다. 시커먼 기억이, 슬픔이 막심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으로 끌어내린다.

어둠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희망

고개 숙인 그가 눈을 돌렸을 때 한 송이 작은 꽃을 발견한다. 투명하도록 순수한 여자 ‘나’다. ‘나’의 순수함이 막심의 어둠을, 죄책감을 덮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일까.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행복함을 느낀다. “뭐가 이토록 내 맘 움직일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 차가운 바람도 오늘은 왠지 따스히 느껴져. 생각도 못했었지. 이런 기분일 줄, 조금은 낯설지만 웃음이 나와. 이 순간 모든 게 새로워져”라고 그는 노래한다. 

‘나’의 순수함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그는 다시 절망에 빠진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애써 묻어두려고 했던 레베카의 기억을 되살리며 막심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칼날처럼 찬웃음. 날 녹여버렸어. 전부 잊을 수 있어도 지울 순 없는 그녀 미소”, 그는 가슴을 찢으며 노래한다. 막심은 다시 절망에 빠져 결혼한 ‘나’에게조차 등을 돌린다.

지켜야만 했던 부를 버렸을 때 다가오는 행복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은 화려한 부와 명성이었다. 그 명성이 자신과 가족의 얼굴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다. 그 소명이 자신을 뒤덮어 잠식할 때쯤, 힘없고 가냘픈 ‘나’는 희망을 노래한다. ‘나’는 믿음으로 막심을 구한다. 믿음은 그를 지탱하게 하고, 부와 권력을 상징하던 대저택 맨덜리는 불타오른다. 동시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레베카의 환영 또한 소멸한다. 그녀가 바라본 것이 부와 명성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품은 진정한 행복은 어디서 시작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초연 전문 배우’ 류정한

극의 중심인물인 레베카가 한순간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존재를 섬뜩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배우 ‘류정한’의 탁월한 표현력 덕분이다. 다양한 무대구성은 그의 연기력에 탄탄한 배경을 제공한다. 대 저택에서 각각의 방은 다른 색채로 꾸며지고, 방안의 소품 하나하나에 레베카의 의미를 깃들인다.

배우 류정한은 지컬계의 ‘흥행보증수표’로 일컬어진다. 그는 탁월한 작품 해석 능력으로 ‘지킬 앤 하이드’, ‘몬테크리스토’, ‘맨 오브 라만차’, ‘두 도시 이야기’ 등 초연 작품들을 히트작 대열에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기대했던 만큼 그의 연기력과 넘버 소화실력은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나’와 사랑을 속삭이는 로맨스 연기에서부터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며 분노하는 모습에까지 그의 역할에 대한 이해력과 몰입도는 탁월했다.

이소연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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