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를 위한 행동요법 중에 ‘노출요법’이 있다. 피하고 싶고 두려운 상황에 오히려 직면하게 해서 불안이나 공포를 이기게 하는 기법이다.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여성의 성 문제를 관객에게 전하는 기법은 유쾌하고 교묘한 ‘노출요법’이다. 10주년을 맞은 이번 공연의 노출은 뭔가 더욱 유쾌해졌다. 공연 이전에는 배우들조차 입에 올린 적이 없다는 ‘그 단어’를 거침없이 말하게 하나 싶더니, 어느덧 관객이 배우와 함께 내는 신음소리로 무대 전체를 채운다.

10주년 공연, 친밀도를 쌓아가는 섬세함과 묵직한 독백 돋보여

10년 전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초연은 관객은 물론 공연 관계자와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겨 줬다. 여성 성기를 공연 전반에 내세운다는 발상 자체가 파격이었다. 초연은 10년 동안 시대 변화의 흐름에 따라 진화해 날카로운 모놀로그에서 따뜻한 트라이얼로그로, 유쾌하고 즐길 수 있는 토크쇼로 변화했다. 이지나 프로듀서에서 이유리 연출로 연출이 바뀌면서 10주년 공연은 또 한 번 새로워졌다. ‘보지’라는 단어에 친밀도를 쌓아가는 섬세한 과정 속에서 현재 국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회적 담론들도 꼼꼼히 짚어냈다. 공연의 후반부에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여성의 아픔인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묵직하고 감동적으로 울부짖게 한다.   

공연 초반 세 여배우의 진솔한 토크는 여성의 성기를 전면에 내세운 무대객석에 긴장태세로 입장한 관객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무장해제 시켰다. 자신의 솔직한 경험을 곁들이면서 가정폭력과 아동성폭행 등 ‘보지’에 대한 실제 사례를 연기한 극적 부분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면서 긴장태세로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 편안함과 감동을 함께 느끼게 했다.

세 배우, 유쾌하게 꼬집고 수다 떨듯이 비판해

이유리 연출은 이번 공연에서 폭력과 아동성폭행과 같은 민감한 사회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문제화하는 연출방식을 택했다. 관객들의 앞에 선 세 배우들은 가르치려 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유쾌하게 꼬집고, 수다 떨듯이 비판했다. 다만 초연 때부터 변하지 않은 실제 사례들의 생생한 재연이 수다 속에 흘려듣기 쉬운 문제인식을 보다 실감 나는 현실감으로 느끼게 했다.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공감대를 높이는 데는 무대와 객석의 형태도 한 몫 한다.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공연장 내부는 여성의 자궁 그 자체인 것처럼 세로로 길고 깊고 어둡다. 이유리 연출은 “무대나 조명의 전반적인 콘셉트를 여성의 자궁처럼 꾸몄다. 여성의 자궁은 우리가 태어난 근원이다. 관객들이 그 공간이 들어오면 판타지 속에 들어오는 것처럼 근원적인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연출의 의도대로 관객은 타인의 비밀을 엿보는 것처럼, 혹은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무대를 지켜보게 된다.

여배우들의 열정, 금기시됐던 이야기의 빗장 쉽게 풀어내

작품의 소재와 내용이 파격적인 만큼 출연진의 용기와 열정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공연 전에는 ‘보지’라는 단어를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이 없었다”는 김여진 배우는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관객의 생각을 대변했다. “연습 초반에는 여성의 성기를 입으로 말하는 순간에 얼굴도 빨개지고 목소리도 떨렸다”던 이지하 배우는 극적으로 가장 큰 변화폭을 보여줬다. 토크쇼에서는 수줍은 모습으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모놀로그에서 대담하면서 강렬한 연기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연의 무대에서 일명 ‘보지탐험대’의 대장을 꼽는다면 정영주 배우다. 18년 동안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하다 이번 작품으로 첫 연극 데뷔를 하게 된 그는 “노래로 발산했던 무대를 연기만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는 자신의 말대로 에너지 넘치는 연기와 무대를 선보였다. 공연 중 아무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쉽고 통쾌하게 발설하는 자유로운 그의 모습이 금기시됐던 이야기의 빗장을 쉽게 풀게 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토크쇼가 진행되는 와중에 특별게스트가 등장하는 점도 독특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무대 위로 초대된 게스트는 극 전체 흐름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관객과 배우들의 중간역할을 해냈다. 관객을 대변하는 동시에 세 명의 고정배우들에게 일관되게 시선이 집중되는 부담감도 덜어줬다. 이유리 연출은 “게스트는 원작의 틀을 벗어나 좀 더 열린 형태로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한다. 얼마 전 게스트로 등장한 송용진 씨는 기타를 들고 나와서 즉석에서 보지송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며 게스트 초대를 공연의 흥미로운 부분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 종군위안부 집회 참여 등 사회적 영역 확대

10주년을 맞은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사회적 움직임은 발전적으로 진화했다. 원작자인 이브엔슬러 여사가 사회적 목적으로 공연을 시작한 데 비해 그동안 국내 공연은 작품 감상에 그쳐온 것이 현실이었다. 이번 공연은 작품의 출연진과 관계자들이 종군위안부 집회에 참여해 목소리를 높이고, 공연수익금 일부를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터전인 ‘나눔의 집’에 기부하는 등 공연장 밖으로 그 영역을 확대시켰다.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단순한 여자들의 성토대회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 비하적인 국내 사회풍토 속에서 왜곡되고 홀대 당했던 여성의 성에 대해 여성 스스로가 새롭게 인식하고 당당하게 직면하도록 한다. 관객은 여성의 성기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구멍’에서 ‘얼굴처럼 모두 모양이 다른 꽃’으로, 나아가 ‘사랑을 확인하는 성스러운 장소’이자, ‘아기를 지키고 탄생시키는 소중한 존재’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따뜻한 파도와 같은 감동을 경험한다.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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