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날마다 그 아이들의 모습을 입을 헤 벌린 채 바라만 보고 있는데, 어느 날 나와 똑같이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또다른 동기생이 한 명 더 있었다. 그 애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이내 친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앞날을 걱정하게 되었다. “어떻게 저런 애들을 따라 잡을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소처럼 우직하게 변치 말고 열심히 하자.”

우리 두 사람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40명 중에 연기자로 남은 사람은 우리 둘 뿐이다. 그 친구가 바로 탤런트 유동근이다.

날이 밝아오면 6층 건물인 극장 옥상에 올라갔다. 난간에 올라서서 느린 걸음으로 걷거나 빠른 걸음으로 걷기를 눈이나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반복했다. 떨어지면 사망 아니면 중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다. 하지만 담력을 키우고 집중력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그런 미친 짓을 한 것 같다.

나는 발성연습, 피아노 연습, 무용연습 등을 배울 수 있는 레슨비는 물론 없었다. 그 당시 왕복 버스비가 70원이었는데, 나의 하루 용돈은 100원 정도에 해당했으므로 물론 도시락도 거의 없이 학교에 다녔다. 매점에서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세숫대야 크기의 양푼을 빌려서 라면을 먹는 친구들에게 십시일반으로 라면을 뜯어 먹었는데, 돈을 내고 사서 먹는 친구들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런 처지에 레슨비를 내고 발레나 피아노를 배운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무용을 배울 때에 멋진 묘안을 짜냈다. 무용과 학생들을 꼬시는 것이었다. 각 파트별로 한 명씩 발레, 한국무용, 재즈 등을 내가 배우는 대신 나는 그들에게 연기를 가르쳐 주겠다고 그 아이들에게 조건을 걸었다. 그 당시에는 연극이 무용화 되고, 무용이 연극화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서로 도움을 주면서 배울 수 있었다.

때마침 우리 학교 교수님이 이화여대 공연장에서 이대의 개교 기념공연을 연출하셨는데, 그 때의 출연진은 이화여대 학생들로서 무용과 학생들과 음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통해서 뽑은 학생들의 공연이었다. 나는 선배들과 그 공연을 관람하러 갔다. 공연이 끝난 뒤에 나는 엄청나게 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 약 한 달간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하! 뮤지컬이 바로 나의 운명이구나. 내가 뮤지컬을 하기 위해서 음대 준비를 했고, 기계체조 공부를 한 것이구나.’

며칠 후 서울 시립가무단이라는 단체의 뮤지컬 공연 ‘시집가는 날’을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하게 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프로 극단의 뮤지컬을 감상하였다. 물론 그 작품도 나에게 엄청난 문화적인 충격을 주었다. 그 날부터 나의 목표는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선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뮤지컬 단체 세종문화회관 소속 시립가무단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곳에 입단하려면 노래, 시창(처음 보는 악보를 바로 보고 노래 부르기), 연기, 춤 등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그 날부터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서 시립가무단 전형에 총력을 기울였다.

 
서울예대 2년 재학 중에 학교를 나가지 않은 날은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장례기간 3일 뿐이었다. 물론 방학 때도 학교에 나가 연습을 했다. 그렇게 준비해서 1977년 12월에 시립가무단 시험을 보게 되었다. 맨 먼저 가창 시험을 보았는데, 내가 부른 곡은 ‘선구자’ 였다. 단장님이신 김희조 선생님께서 껄껄껄 웃으시더니, “그게 노래야, 고함이지?” 다시 한 번 서울예대 입시 치르던 때가 떠올랐다.

다음 순서는 시창시험이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8마디 중에 8개를 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또 다시 단장님께서 “연극과 졸업생 치고는 준비를 꽤 했구먼.” 하고 말씀하셨다. 다음은 장소를 옮겨서 연기 시험을 치르는 순서였다. 그런데 구경을 하던 선배 단원들이 내가 시험 보는 장소로 우르르 따라왔다. 물론 무용 시험 장소로도 따라와서 구경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상당히 웃겼는지 시험 보는 내내 깔깔대고 웃어댔다.

시험을 치르고 신입단원 23명을 선발했는데, 결과 나는 최연소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인 1978년 1월 23일에 정식 단원으로 임용되었다. 내가 받은 첫 월급은 약 6만원 정도였다. 그 당시 세종문화회관은 소속 단체의 수보다 연습실이 부족했기 때문에 2부제로 연습을 해야 했고, 가무단의 출근 시간도 어떤 때는 10시, 어떤 때는 2시였다. 1년에 공연을 한 편 정도 무대에 올렸는데, 연습은 약 두 달 정도였다.

공연 연습 기간 중 하루 연습시간은 대략 4시간에서 6시간이었는데, 공연이 없는 시기에는 출근해서 2시간만 연습하면 퇴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개인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나로서는 너무나 소중한 개인시간들이었다. 나는 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연습실로 향했으므로 경비아저씨들의 원성이 높았다. 
“남경읍 씨, 잠 좀 잡시다.” 
“죄송해요 아저씨! 제가 나중에 소주 한 잔 대접해 드릴게요.” 
6개월 정도 지나면서 세종문화회관 모든 경비 아저씨들과 술친구가 되었고, 연습실을 나오는 시간은 밤 10시 반 정도였다.

가무단 연습 시간이 지나면 타 단체들이 연습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빈 연습실이 없을 때가 많았다. 복도에서나 화장실에서 발성연습을 하거나 탭댄스 연습을 하면 다른 단체 단원들이 제발 조용히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연습할 공간이 없어진 나는 궁리 끝에 그 당시 공연일수가 많지 않은 세종문화회관 분장실이 연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