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은 능지처참도 추방도 교수형도 아닌 기록말살형이었다. 특히 이름 남기기를 좋아한 로마인들에게 그것만큼 잔인한 것은 없었던 듯 하다. 우리나라에도 호적을 파버린다는 말이 있으니 먼 나라의 일은 아닌 셈이다.

호적을 파진 않았지만 스스로 호적에 빨간 줄을 그어버린 사내가 있다. 그는 해방 전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자진해서 징병 보낸 친일파 이중생이다. 해방 후 이중생은 미 군정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민족재산을 사유화하려는 수작을 부린다. 시대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던지 자신의 재산불리기에는 탁월한 본능을 타고났다. 아들을 일본군에 징병 보내듯 딸을 O.E.C직원으로 사칭한 랜돌프란 사기꾼에게 바치기까지 했으니 그의 간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극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이중생이 국회 반민특위의 조사대상이 된다. 선대에게 물려받은 재산과 친일로 불린 재산을 졸지에 빼앗길 처지가 되자 간교는 더 활개를 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 하식은 10여년 만에 돌아와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한 이중생의 몰락에 종지부를 찍는다. 망국의 고통 속에서 시류에 편승해 기회주의적인 안위만 도모하고 호의호식한 과거로 대변되는 이중생과 새로운 세대, 새로운 사람으로 대변되는 하식이 시대의 전환을 말해준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슬로우 모션을 연상하게 한다. 가족이 하식과 함께 방에 들어간후 홀로 마루에 남겨진 이중생의 씁쓸함이 객석에도 전해진다. 이 사기극은 실로 현실이 된다.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이중생이 목숨을 내려놓는 순간에 다리를 긁적이는 모습은 기본적인 욕구충족에 대한 본능으로 느껴진다.   

작품은 ‘살아있는’ 이중생을 법률상 ‘죽어있는’ 이중생으로 만드는 과정의 부조리와 모순을 해학적으로 풀어내 현실에 대한 통렬한 풍자정신을 드러냈다. 또한 현대적인 개그까지 더해져 순간순간 재기발랄한 상황을 연출했다.

배우들의 독특한 억양은 공연 10여분 정도의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긴 하나 관객은 금새 착착 감기는 대사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이중생의 큰 딸 하주가 다른 배우와 맞받아치는 대사,  남편을 설득할 때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식 연기 등은 관객을 가가대소하게 만든다. 또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하식이가 이중생에게 던지는 호통 등은 순간 정신이 번쩍 뜨이는 파격이었다.

연희단거리패는 독자적인 대사처리와 몸의 사용, 한국 전통 굿의 신명을 바탕으로 곳곳에 웃음의 요소를 만들어놓고 천연덕스럽게 혹은 능청스럽게 극을 이끌었다.

연극 ‘살아있는 이중생각하’는 제1회 대학로코미디페스티벌 참가작으로 오는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뉴스테이지 전성진 기자  newstage@hanmail.net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