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남작 부인 맞아?” 공연을 보고 나오는 관객의 수군거림이 심상찮다. 뮤지컬 ‘스팸어랏’에 출연 중인 신영숙 얘기다. 올해 초 뮤지컬 ‘모차르트!’의 우아한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으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가 이번에는 대책 없이 망가졌다.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이야기를 코미디로 풀어낸 이 뮤지컬에서 신영숙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명색이 호수의 여인, 디바 역. 블링블링한 드레스를 한껏 차려입고 신비롭게 등장하지만 이내 ‘입냄새 나’. ‘오줌 마려워’ 같은 노래가사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여주인공인 자신의 분량이 너무 적다며 신세한탄을 늘어놓다가도 관객의 박수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 폴짝거리는 푼수 여신이다. 모든 공연 사진이 굴욕샷이 될 정도. 신영숙을 남작 부인으로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 같은 변신이 얼떨떨할 테지만 그녀는 본래 코미디에 무척 능한 배우다.

- 푼수 디바에서 얼음공주 투란도트로

“사실 웃기는 캐릭터를 여럿 했었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코믹한 유모 역이 저의 대표적인 캐릭터였으니까요. 오히려 너무 코믹 쪽으로 이미지가 굳어지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어요. 저를 최근에 캐퓰럿 부인이나 그리자벨라, 발트슈테텐 남작 부인으로 처음 접한 분들은 이번 작품을 보고 깜짝 놀라시지만 예전부터 알아온 분들은 ‘물 만났구먼’ 하세요. (웃음).”
‘모차르트!’를 끝내고 오랜만에 출연한 코미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본디 남을 울리는 연기보다 웃기는 연기가 힘들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동료들의 에너지는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완전히 나를 놔버렸어요. (웃음) 넘버들도 쉽게 부를 수 있는 곡들이 아니에요. 다양한 발성을 써야 하고 호흡이 굉장히 길어야 해요. 노래를 제대로 부르면서도 웃겨야 하니까 더 힘들죠. 연습하면서 고민도 많았고 잠을 설치면서 연구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참 신나고 행복한 작업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일단은 코믹 코드가 저랑 잘 맞아요. 그리고 우리 사랑스런 동료들! 어디서 이런 배우들만 모였는지... 함께 하는 배우들의 깨알 같은 애드립은 보고 또 봐도 재미있어요. 커튼콜 때 미소 짓는 관객 분들을 보면 참 뿌듯하고요. 배우란 직업이 관객의 박수와 기를 받아 하는 일이니까요.”

신영숙은 요즘 ‘스팸어랏’과 뮤지컬 ‘투란도트’ 연습을 병행하느라 두 얼굴로 살고 있다. ‘투란도트’는 동명의 오페라를 뮤지컬로 각색한 작품으로 12월 11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대구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가진 뒤, 내년 6월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선보일 계획. 중국과 멕시코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이건명, 임혜영, 김성기 등 쟁쟁한 배우들이 함께 하는 이 작품에서 신영숙은 타이틀 롤인 투란도트를 연기한다. 구혼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  풀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하는 얼음공주로 호수의 여인과는 180도 다른 캐릭터. 또 ‘스팸어랏’이 끝난 직후에는 프랑스 뮤지컬 ‘코로네이션 볼’에 합류할 예정이어서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는 일정이다.
“되도록 겹치기는 피하려 하지만 요즘 일이 너무 재밌어서 좀 욕심을 내고 있어요. 투란도트는 호수의 여인과는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서 연습할 때도 차분하고 도도해지려고 노력해요. (웃음) 올 한 해 남작 부인에서 여신, 또 공주 역까지 맡게 되다 보니 팬들은 저한테 귀족 전문 배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사실 하나하나 전혀 다른 역이죠. 배우가 한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캐릭터를 오갈 수 있는 건 참 감사한 일이에요.”
수다쟁이 유모(로미오와 줄리엣), 강인한 여전사(바람의 나라), 희대의 요부(뮤지컬 이(爾)), 뒷골목 고양이(캣츠), 우아한 귀족(모차르트!), 망가지는 여신(스팸어랏), 도도한 공주님(투란도트)... 무엇 하나 겹치는 캐릭터 없이 다양한 배역을 연기해온 신영숙. 작품을 고를 때 캐릭터와 자신이 얼마나 어울릴지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그녀에게도 가장 탐나는 작품이 있다. 내년 하반기 선보일 예정인 오스트리아 뮤지컬 ‘엘리자벳’이 그것이다.
“‘엘리자벳’은 저의 꿈이죠. 얼마 전 뮤지컬 콘서트에서 엘리자벳의 아리아 한 곡을 불렀는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드라마와 넘버가 정말 훌륭한 작품이에요. 엘리자벳을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이 아니라 굉장히 인간적으로 그려낸 것이 맘에 들고요. 단 한 회라도 엘리자벳으로 무대에 설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 같아요. (웃음)”

- 황금별, 황금영숙... 황금성대

영화 영(榮), 맑을 숙(淑). 영숙. 배우의 이름으로 너무 평범한 것 같아 개명까지 심각하게 고려해봤단다. 하지만 신영숙이라는 이름은 이제 뮤지컬계에서 특별한 이름이 됐다. 그녀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노래의 공. 성악을 전공해 진성과 가성을 유려하게 넘나드는 신영숙의 가창력은 그녀의 작품을 찾게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지금껏 한 번도 음이탈을 해본 적이 없다는 그녀에게 ‘뮤지컬계의 황금성대’라는 수식어를 붙여줘야 할 것 같다 말하자 방 안 가득 쩌렁한 웃음소리가 퍼진다.  
“(웃음) 성대가 좀 튼튼하긴 하죠. 목청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발성을 하면 새벽에도 좋은 소리가 나요. 하지만 목청이 좋다고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예전에는 노래를 완벽하게 불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어서 노래 자체에 대한 완벽주의를 내려놓으려 해요. 뮤지컬에서 노래는 결국 연기예요. 관객들과 노래에 담긴 정서를 교감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 우선이죠. 그냥 테크닉적으로 노래를 잘한다고 감동을 주는 건 아니거든요. 감동을 주는 노래를 부르기 위한 고민은 뮤지컬 배우를 하면서 계속 가져가야 할 숙제인 것 같아요.”
1999년 ‘명성황후’의 손탁 역으로 데뷔, 8년여의 서울예술단 시절을 거쳐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걸어온 지 10여년. 앙상블부터 시작해 조연과 주연을 두루 거치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신영숙에게 2010년은 선물과도 같은 한 해였다. 뮤지컬 ‘모차르트!’의 발트슈테텐 남작 부인으로 주연 못잖은 사랑을 받은 것. 극중 남작 부인이 모차르트에게 들려주는 넘버 ‘황금별’은 오롯이 그녀의 노래였다. 실베스터 르베이의 아름다운 음악은 신영숙의 가창력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녀는 황금영숙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08년 ‘캣츠’의 그리자벨라로 신영숙이라는 이름을 알렸다면 2010년 ‘모차르트!’의 남작 부인으로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받은 것 같아요. 전 한 번도 스타를 꿈꾼 적은 없어요. 그저 뮤지컬을 하는 게 너무 행복하고 좋은 배우로 오래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작품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매번 ‘이 캐릭터가 나의 베스트 캐릭터다’라고 생각하고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했어요. 지난 길을 돌아봤을 때 한 가지 스스로 대견한 것은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배역을 연기했다는 점이예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초심 잃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여드릴게요.”

(뮤지컬 ‘스팸어랏’ : 1월 2일까지. 한전아트센터)

조수현(공연 칼럼니스트) lovestage@empal.com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