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미남, 꽃미남, 훈남은 가고 짐승남의 시대가 왔다. 짐승남이란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미가 철철 넘치는 남자를 일컫는 말로 과거 터프가이의 진화형이라 할 수 있다. 마구잡이로 남발하는 신조어를 쓰는 것이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아 살짝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한번 생각해봤다. 뮤지컬계의 대표 짐승남은 누굴까? 그러자 대번에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100m 밖에서도 표정을 식별할 수 있을 것 같은 뚜렷한 이목구비, 호방한 무대 매너, 에너지와 기백이 넘치는 배우. 이번 ‘스테이지피플’의 손님은 뮤지컬계 짐승남 대표 선수 문종원이다.

- 문제아에서 뮤지컬 배우로

2004년 ‘렌트’의 앙상블로 본격적인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문종원은 사실 배우가 꿈은 아니었다. 1979년 대전에서 태어나 20여년을 대전 토박이로 보낸 그는 별다른 꿈이 없었다고. 무엇을 하든 그저 부모님, 형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다. 치맛바람이 거센 학군에서도 유독 공부를 잘했던 문종원은 고등학교 진학 후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며 공부와 멀어져갔다. 문종원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문제아’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정리했다.
“졸업도 못할 뻔 했으니까요.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알게 된 신세계에 흠뻑 빠졌죠. 남자는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았고. (웃음) 제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어머니 덕분이에요. 저를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시려고 수영도 시켜보고, 조소도 시켜보고, 나중엔 발레까지 시키셨어요. 1년 정도 다녔는데 발레는 하나도 못해요. 학원 앞에서 당구만 쳤으니까. (웃음) 그런데 대학 입시를 두 달 남기고 무용 학원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무슨 생각이셨는지 연극영화과를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별 생각 없이 연영과를 지원했죠.”
문종원은 그렇게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목적 없이 간 대학이니 학업에 전념할리는 만무할 터. 역시나 놀기만 했단다. 그렇게 놀기를 1년 반. 제적당할 위기에 몰린 문종원은 1999년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2001년 제대 후 한 친구의 뮤지컬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대학 동기였던 (조)승우가 주인공을 맡았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뮤지컬을 봤어요. 그게 태어나서 처음 본 뮤지컬이었는데 정말 충격이었죠. 아, 이런 게 있구나. 승우가 막 달리 보이고. (웃음) 승우가 워낙 유명해져서 이런 말하기 좀 쑥스럽긴 한데, 뮤지컬을 하게 된 계기가 승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게 뮤지컬의 매력에 끌려 발을 들였지만 문종원은 뮤지컬이 자신의 길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스스로의 연기에 대해 자신감도 없었고 타인에 의해 평가를 받는 게 괴롭기만 했다고. 공연 전날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무대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러던 그가 운명과도 같은 두 작품을 만나면서 비로소 연기를 하는 의미를 찾게 되었다.

- 무대에 서는 의미를 찾다

문종원의 2007년작 ‘갓스펠’은 그가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는 작품이다. 신약성서 중 마태복음의 성서구절을 뮤지컬화한 이 작품에서 예수를 연기했던 문종원은 혼신을 다한 연기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깨달았다.
“‘갓스펠’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제 마음이 온전히 다 들어간 작품이에요. 6,7 회 정도 공연을 했는데 매회 배우, 스텝, 관객 할 것 없이 모두가 울었죠. 제 연기가 누군가에게 점 하나 정도의 의미는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걸 느꼈고 그 때부터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제 연기로 인해 사람들이 뭔가를 얻어간다고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힘이 엄청나게 나요. 그게 무대에 서는 가장 큰 힘이죠. 무대에 서는 이유고.”
‘갓스펠’이 문종원의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면 그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노트르담 드 파리’는 배우 문종원을 성장시켜준 작품이다. 문종원이 연기한 클로팽은 카리스마 넘치는 집시의 우두머리이자 여주인공 에스메랄다의 보호자로 그의 개성과 장점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캐릭터였다.
“2007년 김해부터 시작해서 2년 정도를 클로팽으로 살았죠. 워낙 장기 공연이라 제가 해보고 싶은 걸 다해 볼 수 있었어요. 사랑도 받고 욕도 먹었죠. 전국 각지를 다니느라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어요. 공중에 매달린 철제빔 위에 서서 ‘기적의 궁전’을 부르는 장면을 연습하다 떨어져서 팔을 다친 적도 있고. 우여곡절이 많아요. 클로팽을 사랑해주신 분들께 너무 죄송한 얘기지만 다시 클로팽을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해보고 싶은 다른 캐릭터가 너무 많기도 하고요. (웃음)”
인터뷰를 할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하게 되는 질문이 바로 해보고 싶은 캐릭터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문종원에게는 그에 앞서 맡기고 싶은 캐릭터가 떠올랐다. 바로 뮤지컬 ‘왕과 나’에서 율 브린너가 연기했던 왕 역할이다. 삭발한 머리와 강렬한 눈빛, 당당한 체격, 우렁찬 보이스. 이보다 적역은 없을 듯하다.
“아! 저희 어머니가 율 브린너를 좋아하세요. (웃음) 그래서 항상 절 보시면서 뿌듯해하시죠. 전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 외모에 관한 재밌는 에피소드가 참 많은데... 외국 여행을 가면 현지인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혼혈 아니냐는 소리도 종종 들어요. (웃음) 해보고 싶은 캐릭터는... 저는 아직 명작, 대작에는 큰 욕심이 없어요. 나이가 들고 진짜 명배우가 됐을 때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꼭 해보고 싶긴 한데, 지금 명작을 좇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에요. 작품의 힘에 묻어가기보다는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작품, 동료 배우와 스텝들 간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공연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작품 ‘아킬라’

그런 의미에서 선택한 작품이 현재 출연 중인 창작 뮤지컬 ‘아킬라’다. ‘아킬라’는 노래를 제외한 대사가 모두 아킬라로 이루어진 실험성 짙은 작품. 원시의 이미지를 간직한 제 3 시대를 배경으로 ‘아킬라’라는 세 음절의 단어조합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부족의 이야기를 다룬 이 뮤지컬에서 문종원은 남녀 주인공 로와 주의 사랑을 질투하는 부족 최강의 전사 카를 연기하고 있다. 사랑 표현에 서툰 카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족장의 딸 주 때문에 절망하고 분노하다 모두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무대에서 포효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카는 클로팽과도 얼핏 겹쳐 보인다.“클로팽의 에로스적인 부분을 극대화한 것이 카예요. 저는 사실 클로팽을 연기할 때도 약간의 사심을 가지고 에스메랄다를 대했거든요. (웃음) 카는 저랑 많이 닮아있어요. 카는 강해보여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해요. 저도 주변에서 자꾸 남자답다고 하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깔게 되고 절도 있게 행동해야 될 것 같고 그렇거든요. (웃음) 사실 저는 막내로 자라서 장난도 좋아하고 애교도 많은 편이에요. 어떤 분들은 대사가 아킬라 밖에 없으니까 대본 외울 필요 없어 좋겠다고 하시는데 오히려 더 정확한 내용과 템포를 숙지하고 가야 해요. 대사가 말이면 연기 호흡의 변화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이건 뉘앙스로만 알아차려야 하니까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거든요.”
‘아킬라’에는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호흡을 맞췄던 윤형렬, 문혜원이 함께 출연해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다. 2년 동안 함께 생활하다시피 한 이들은 이제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 특히 윤형렬과는 ‘노트르담 드 파리’에 함께 출연했던 김성민, 최수형과 함께 올해 초 그룹 ‘포원’을 결성해 가수로도 무대에 서고 있다. 가장 아끼는 친구, 동생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 무척 행복하다고.
“뮤지컬만 해도 행복한데 굳이 앨범을 내고 가수 활동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구분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요. 함께 있어 좋은 사람들과 같이 설 무대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포원’ 2집은 빠르면 연말 쯤 나올 것 같은데, 뮤지컬 넘버로 엮었던 1집과는 달리 이번엔 제대로 곡을 받아서 선보이려 해요.”

본격적인 뮤지컬 배우의 길로 들어선지 햇수로 6년. 비로소 무대에 설 이유를 찾은 것 같다는 문종원. 100% 테스토스테론으로만 똘똘 뭉쳐있을 것만 같은 뮤지컬계 대표 짐승남이 무대에 서는 이유는 바로 ‘사랑’이었다.
“제가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는 배우, 저의 공연을 보신 분들이 저로 인해 사랑의 느낌을 받아갈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어떤 역을 연기하든 결국은 인간이고. 인간 본성 중 제일은 사랑이니까요. 제 연기로 인해 주변을 돌아보고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신다면 좋겠습니다.”

(뮤지컬 ‘아킬라’: 11월 8일까지. 한전아트센터. 송시현 연출. 윤형렬, 문혜원, 문종원, 성민 등 출연.)


조수현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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