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은 이제 한국 뮤지컬계의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다. 조승우의 트랜스젠더 로커 변신으로 화제가 되었던 2005년 초연 이래 헤드헤즈라 불리는 열광적인 마니아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어느 덧 5번째 앙코르 무대를 진행 중이다. 성전환 수술에 실패한 남자도 여자도 아닌 동독 출신 로커 헤드윅의 다이얼로그가 강렬한 록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헤드윅’은 주인공의 원맨쇼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타이틀 롤의 장악력이 필수인 작품. 오만석, 송용진 등 무대를 거쳐 간 14명의 헤드윅은 각자의 해석과 개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시즌 관객은 전혀 새로운 헤드윅을 만났다. 윤희석. 그의 헤드윅은 소외된 자의 분노와 냉소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놓지 않고 있다. 애증의 존재인 남편 이츠학에게까지 박수를 유도해줄 정도. 이렇게 친절한 헤드윅이라니. 팬들은 그녀(혹은 그)를 천사표 헤드윅 ‘엔젤리나’라고 부른다.

- 윤희석의 헤드윅, ‘엔젤리나’

초연과 늘 비교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배우에게 앙코르 공연은 늘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다. 윤희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003년 영화로 ‘헤드윅’을 접하고 이미 작품의 열렬한 팬이 된 그에겐 부담보다는 열망이 앞섰다.
“관객의 반응을 신경 썼다면 절대 시도하지 못했을 거예요. ‘헤드윅’을 통해서 무슨 혜택이나 영광을 누리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배우 이전에 저도 한 명의 헤드헤즈로서 이 공연을 너무 좋아하니까요. 정말 하고 싶었던 공연을 하게 돼서 참 행복합니다 (웃음).”
그렇게 ‘헤드윅’으로 분하게 된 윤희석의 헤드윅은 엔젤리나라 불린다. 통상 배우의 이름글자를 따서 오드윅(오만석), 조드윅(조승우) 등으로 불려왔던 전례에 비춰 이는 특별한 케이스. 이와 비슷한 경우는 사연 많은 여자 같다 하여 붙여진 이석준의 베로니카가 있다.
“윤드윅이라는 호칭은 함께 하는 도현이 형이 당연히 가져가셔야 하는 거죠. 그래서 저를 뭐라 부를지 제 팬 카페에서 공모를 했나 봐요. 마침 제 팬 카페 이름이 수호천사라 그걸 따서 엔젤리나라고 부르게 됐고요. 사실 좀 낯간지럽긴 해요 (웃음).”
팬 카페 이름을 따서 엔젤리나라 불리게 됐다지만 그 호칭은 윤희석이 풀어내는 헤드윅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저의 콘셉트를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이 많았죠. 어차피 ‘헤드윅’을 오래 해오면서 다양한 시도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뭘 해도 그 간의 아류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아요. 예쁜 헤드윅도 많았고, 아주 절절한 만석이, 깜찍한 정석이도 있었고요. 근데 이지나 연출 선생님이 조언을 해주신 게, ‘헤드윅 마니아가 아닌 공연을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 정보를 주는 헤드윅이 돼보자’ 하시더라고요. 어차피 저는 스타 배우도 아니고 마니아층이 있는 배우도 아니라 공연 자체를 보러 오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래서 그 분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가면서 해야겠다는 생각에 유일하게 구연동화 하듯 풀어서 자기 얘길 하는 헤드윅이 된 것 같아요.”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선 굵은 외모의 소유자인 윤희석이 여자로 변신하는 과정도 콘셉트를 잡는 과정만큼이나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외국의 유명 드랙 퀸(여장 남자) 루 폴을 모델 삼아 여자가 되어 가면서 그는 여성들의 고충을 많이 이해하게 됐다고.
“일단 10kg 정도 감량을 했어요. 섹시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태닝도 하고요. 4시간 걸려서 네일 아트도 해봤어요. 그렇게 힘들게 손톱을 붙여놨는데 깨지고 떨어지는 건 너무 순식간이라 참 속상하더라고요. 그래서 깨달았죠. 여자로 산다는 게 쉽지 않구나. 여자란 참 위대한 존재구나 (웃음).”

- ‘헤드윅’은 미국판 씻김굿

많은 남자 배우들에게 ‘헤드윅’은 도전 의지를 불태우는 캐릭터다. 그리고 이 작품을 거쳐 간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연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헤드윅’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에게도 ‘헤드윅’은 일종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어요. 최근에 내 연기가 너무 갇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요. 헤드윅을 통해 절제를 좋아하는 제가 얼마만큼 감정의 끝까지 갈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죠. 배우 윤희석을 정화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윤희석은 ‘헤드윅’을 미국판 씻김굿으로 정의한다. 화려한 의상의 무당(헤드윅)이 마을 사람들(관객)이 보는 앞에서 연주자(밴드)들을 데리고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빙의의 대상(토미)를 떠나보내는 형식 또한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가끔은 접신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무서울 때도 있어요. 마지막에 가발을 벗어던지고 토마토를 으깨며 절규하는 씬에선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것이, 이런 게 접신인가 싶기도 하고요. 무대에 너무 빠져서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가 없는 거죠. 무척 색다른 경험이에요.”
그렇게 감정의 끝을 경험한 윤희석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픈 ‘헤드윅’의 정서는 화해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받고 슬픔을 안고 살아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고 살죠. 헤드윅도 공연 내내 ‘나는 상처받았고 내가 가장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막상 나쁜 놈이라 비난했던 토미가 먼저 손을 내밀자 무너지고 말죠. 그리고 다 끌어안게 되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자신만의 길을 가죠. 결국 헤드윅은 화해에 대한 얘기인 것 같아요.”
느릿느릿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가는 윤희석의 목소리엔 묘한 설득력이 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세상과 화해한 헤드윅이 어디선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만 같아 안도감이 밀려온다.

- 한 호흡 천천히 나의 길을 간다

1998년 연극 ‘터미널’로 데뷔한 이래 배우의 길을 걸은 지 햇수로 13년. 기간에 비해 작품 수는 적은 편이다. 생활고로 인해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 연기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결국 그는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연기에 대한 갈증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공부해 석사 학위도 받았다.
“(하늘을 가리키며) 저 분의 뜻인가? (웃음) 잘은 모르겠지만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끈을 놓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일도 평생직장을 구하지 않고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일들을 했죠. 보험회사, 택시, 장사 같은...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된 건 2005년 ‘그리스’를 하면서부터예요. 2000년에 ‘록키호러쇼’로 인연을 맺은 이지나 선생님이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리스’에 캐스팅해주셨고 작품의 인기에 힘입어 영화와 드라마도 하게 됐어요. 그 인연이 ‘대장금’, ‘헤드윅’까지 이어졌으니 저에겐 은인과도 같은 분이시죠.”
그렇게 윤희석은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중이다. 장르도 비중도 중요하지 않다. 최근 개봉한 영화 ‘의형제’에서 남파 간첩인 강동원의 동료 손태순을 연기한 그는 애초에 더 큰 배역 제의가 들어왔었지만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손태순을 택했다.
“저는 장르에 대한 고집이나 비중에 대한 욕심은 정말 없어요. 캐릭터가 재밌고,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도전해보고 싶으면 하는 거죠. 또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기보단 저와 캐릭터가 만나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진정성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어차피 윤희석이라는 사람이 연기의 재료고, 내가 경험하고 상상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거니까 나를 떨어뜨릴 순 없는 일이죠.”
수만명의 배우들 중 선택 받아 연기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 말하는 윤희석. 조급해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그가 참 믿음직스럽다. 믿음을 주는 배우 윤희석. 준비된 배우인 그가 언젠가 날개를 달고 비상할 순간이 눈앞에 그려지는 이유다.

p.s  윤희석과 우유부단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기인 (이)선균이, 지금은 쇼호스트를 하는 친구, 후배 (강)필석이, 그리고 저, 이렇게 넷이 제일 친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백수이던 시절 거의 4년을 일주일에 8번 만났어요. 집에 들어갔다가 한번 더 만나는 거죠 (웃음). 우리 스스로를 ‘우유부단’이라고 불렀는데 순전히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나온 말이에요. 일단 만나긴 하는데 돈이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결정을 못 내리고 서로 미적미적하면서 야, 우리는 왜 이렇게 우유부단한 걸까? 그랬죠 (웃음). 그래도 생각해 보면 그 때가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아요. 돈은 없었지만 길거리에 서서 몇 시간 동안 수다만 떨어도 재미나던 시절이었어요.”
 
(뮤지컬 ‘헤드윅’: 2월 28일까지 KT&G 상상아트홀, 2010.02.26 ~ 2010.02.27 대구 수성아트피아 용지홀, 2010.03.20 ~ 2010.03.21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010.03.05 ~ 2010.03.07 부산MBC 롯데아트홀, 2010.03.13 ~ 2010.03.14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해돋이극장,  2010.04.03 ~ 2010.04.04  고양 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

조수현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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