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꼽히는 공연의 매력적인 캐릭터에 한창 주목 받는 배우가 캐스팅됐을 때, 그것이 화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 역으로 출연할 홍광호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지난해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타이틀 롤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홍광호는 다음달 13일 최연소 팬텀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는 현재 같은 작품의 라울 역으로 출연 중. ‘오페라의 유령’이 1년여에 이르는 장기 공연이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나 배우가 한 공연의 두 가지 상반된 배역으로 무대에 서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홍광호가 라울과 팬텀으로 번갈아 무대에 서게 된 것은 100% 제작진의 의지. 그에 대한 제작진의 기대와 신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자 뮤지컬 배우들의 로망인 지킬에 이어 팬텀으로 분할 홍광호. 나도 그가 궁금한 수많은 인터뷰어(interviewer) 대열에 합류했다.

- 라울을 보내는 아쉬움과 팬텀을 맞는 설렘

나는 대략 그의 13번째 인터뷰어였다. 하루에만 6번의 인터뷰를 진행한 적도 있다니. 같은 얘길 반복해 이야기해야 하는 작업이 피곤하진 않을지 오지랖 정신이 발동한다.
“제 생각이 잘 전달된 것 같은 기사가 나오면 재밌고 기분도 좋아요. 근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참 속상해요. A형인데 B형 남자로 소개된 적도 있고. 아무래도 라울에서 팬텀으로 넘어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시다 보니 그렇겠지만, 전 라울에 굉장한 애정을 갖고 있는데 라울은 별 매력이 없고 팬텀이 매력적이라는 듯한 뉘앙스는 참 속상하더라고요.”
라울에 충실하고 싶어 일부러 팬텀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그의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라울을 슬슬 보내야 하는 시점이 되니 라울을 보내는 것이 더욱 아쉽고 좀 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는 홍광호다.
“어쩜 지금이 과도기인 것 같아요. 다른 작품 한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비우고 시작하고 싶은데 라울로 좀 더 무대에 서야 하는 상황이라… 예전부터 두 캐릭터가 겹쳐 보이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거든요.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좋은 기횐 것 같아요. 두 역을 해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되게 감사하고 있어요. 다행히 라울 역에 더블 캐스팅인 (정)상윤이 형이 저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멋진 라울을 하고 계셔서 떠나는 입장에서 마음이 놓이고요. 든든하고 듬직하고. 형이 아프지 않고 계속 잘 해줬으면 좋겠고. 앞으론 한 무대에서 라울과 팬텀으로 만날 거니까 기분도 좋고 그래요 (웃음).”
라울을 보내는 아쉬움과 팬텀을 맞이하는 설렘, 그리고 부담이 교차한다는 홍광호는 라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만큼 이제 팬텀이라는 인물에 파고드는 중이다.
“많은 분들이 다른 팬텀(윤영석, 양준모)과 차별화를 물어보시는데요. 저는 솔직히 형들이 어떤 팬텀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재미를 위해서 프리뷰 기간 외에는 공연도 안 봤어요. 그냥 정확하게 하고 싶어요. 전 ‘오페라의 유령’의 관객 분들은 이야기를 좋아해주시기 때문에 많이 보러 오신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아니라 작품을 보러 오시는 거죠. 그래서 저를 드러낸다기보다는 작품을 잘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기괴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팬텀이라는 캐릭터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다. 유일한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인 크리스틴에 대한 감정 역시 뭐라 정의하기 어렵다. 캐릭터에 대한 질문을 하자 그의 눈빛이 빛나고 나지막하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상황을 우리나라로 바꾸고 제가 뮤지컬 배우 홍광호예요. 얼굴을 다쳐서 무대에 설 수 없고요. 우연히 고아원에 갔다가 뮤지컬 배우로서 재능이 있는 아이를 발견해요. 그 아이를 통해서 저의 재능을 표현하고 싶겠죠? 공을 무지하게 들여요. 10년 이상. 그러면서 사랑하게 되고요. 근데 어떤 놈이 나타나서 날름 데려가려고 하면 절대 못 가게 막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크리스틴에 대한 감정을 두 가지로 놓고 봤거든요. 자기 예술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통로, 그리고 내 사랑. 근데 최근엔 이 두 가지가 결코 구분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제도 팬텀이 그렇게 집착하던 크리스틴을 마지막에 왜 보내줬을까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나는 추한 외모 때문에 크리스틴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단 말이죠. 근데 결국은 모든 것이 나의 비뚤이진 영혼 때문이었음을 깨달아요. 그래서 마지막 양심으로 나보다 더 나은 남자에게 보내는 거죠.”

- 노래는 연기의 일부분일 뿐

홍광호를 이야기할 때 그의 가창력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제부턴가 그에게는 ‘미친 가창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조승우는 “홍광호의 노래에 비하면 내 노래는 쓰레기”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고, 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부러운 가창력의 소유자로 홍광호를 꼽는다. 상황이 이 정도면 자신의 노래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만한데도 홍광호는 자신의 가창력에 대해 한없이 냉정했다. 자기 노래에 대해 몇 점이냐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한참을 뜸을 들이다 결국은 “매기지 않겠어요”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질문을 바꿔 그가 생각하는 가장 노래 잘하는 사람을 물었다.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아요. 뮤지컬 배우로 한정을 한다면 여자는 김선영 누나. 누나의 노래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인데 누나는… 잘해요 (웃음). 남자는 조승우 형. 제가 형보다 나은 게 있다면 고음 좀 더 잘 올라가고 목소리 좀 더 크다는 건데 그건 진짜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승우 형은 차원이 다른 노래를 하고 계시죠. 형이 고맙게 저를 그렇게 띄워주시지만 (웃음)… 형의 공연을 보고 있으면 전 힘이 다 빠져요.”
많은 이들이 홍광호의 노래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있어 노래는 연기의 한 부분일 뿐, 작품에 대한 모든 고민은 결국 연기로 귀결된다.
“노래를 기술적으로 잘한다고 말하는 건 예를 들면 뮤지컬에서 화술 같은 거예요. 화술이 좋다고 연기를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노래도 연기의 한 부분이고,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건데. 그래서 이번 같은 경우는 어… 노래를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긴 해요. 아니 버린다는 표현은 그렇고. 뮤지컬에서 노래와 연기를 구분한다는 건 모순인 것 같아요. 보통 뮤지컬 배우를 표현할 때 ‘노래, 춤, 연기 3박자를 갖춘’이란 표현을 쓰잖아요. 재밌는 표현이기도 한데 이게 사실 배우 입장에선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노래 연기, 대사 연기, 움직임 연기로 나누고 싶어요. 그렇게 배웠고요.”

- 팬텀, 좋은 창작 만날 수 있는 발판 됐으면

사람들은 흔히 홍광호를 깜짝 스타로 생각한다. 2006년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폐막 일주일 전 남자 주인공 크리스 역을 맡았던 배우(마이클 리)의 몸 상태가 갑자기 좋지 않아 투이 역 커버를 하고 있던 홍광호가 대신 무대에 섰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에피소드다. 이후 ‘첫사랑’, ‘스위니토드’, ‘씨왓아이워너씨’, ‘지킬앤하이드’, ‘빨래’ 등의 완성도 높은 창작과 라이선스를 거치며 주역 배우로 자리 잡았으니 그가 고속질주를 해왔다고 여기는 것도 어찌 보면 그럴 듯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뮤지컬 배우가 되리라는 확고한 꿈을 가슴에 품은 이래 숱한 좌절을 맛보았던 그에게 깜짝 스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심하게 안 풀리던 시절이 있었어요. 2002년 ‘명성황후’로 데뷔하고 2006년 ‘미스 사이공’을 하기까지 텀이 있잖아요. 서류 심사에서부터 셀 수 없이 떨어졌어요. 그 때 졸업하고 군대를 빨리 다녀온 게 지금 와선 참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웃음). 그리고 제가 그렇게 성장을 했나요? 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차근차근 왔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예전엔 맘이 급했는데 지금은 조급하지 않다는 게 달라진 점이죠.”
홍광호의 꿈은 뮤지컬 배우였다. 그냥 배우가 아닌 뮤지컬 배우. 길을 차단해 놓은 건 아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도 큰 관심이 없고 연출에도 전혀 욕심이 없단다. 뮤지컬 배우가 되어 꿈을 이룬 홍광호는 또 다른 꿈을 꾼다. 설렘을 주는 작품을 만나는 것이다.
“예전엔 참 하고 싶은 캐릭터도 많았는데 지금은 무의미한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제 욕심으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가 맞아야 되는 건데… 저는 캐릭터보다 작품을 먼저 봐요. 그게 중요하다는 걸 갈수록 느껴요. 같이 하는 배우들도 중요하고요. 딱 봤을 때 나를 설레게 하는 작품을 선택을 하려 하거든요. 그것이 창작 뮤지컬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죠. 팬텀도 제가 좋은 창작 뮤지컬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제가 좋아서 하는 뮤지컬이니 매번 최선을 다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배우이고 싶고요.”

인터뷰가 끝나고 홍광호는 평소보다 훨씬 말을 못한 것 같다며 걱정했다. 본인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신중하려 했던 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 것 같단다. 확실히 그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말 사이의 쉼표도 말줄임표도 유독 많았던 인터뷰이(interviewee)다. 그러나 때론 문장 사이의 여백에서 더 많은 진심을 느끼는 법. 홍광호는 진심을 담아 말하는 사람이었고 무언가 꾸며내는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이었다. 무대 위 그도 진심을 담아 연기하기에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리라.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까.

p.s 많은 여성 팬을 대신해 물어보았다. 예전 인터뷰에서 그는 이상형의 여성으로 ‘밥 잘 먹어주고 등 잘 긁어주는 여자’를 꼽았는데 왜 하필 등 잘 긁어주는 여자인지?
“그만큼 다정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왜 등을 긁으면 손톱이 유독 시원한 사람이 있거든요. 어머니가 그런 분이에요. 어릴 때 제가 저혈압이라 아침에 잘 못 일어났어요. 그럴 때 등을 긁어주시면서 기도해주셨거든요. 그게 좀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되게 사랑을 받고 싶은가 봐요 (웃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2010년 8월 8일까지. 샤롯데씨어터. 윤영석, 양준모, 홍광호, 김소현, 최현주, 정상윤 등 출연)

조수현 기자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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