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그저 먹고 살았던 거예요… 그렇게 모아서 뭘 하려고 했는지…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 산다는 게 뭔지 이 나이가 되어도 모르겠어요.” - ‘낮잠’ 중 영진의 대사-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 수명 82세. 통계만 따진다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은 나지만 간혹 산다는 게 무지하게 허무해질 때가 있다. 인생이 뭔지, 산다는 게 뭔지… 썩 어울리지 않는 심오한 고민이 밀려올 때면 나는 그것에 맞서는 대신 나만의 동굴을 파고 깊숙이 그 안으로 숨어든다. 그렇게 눈 감고 귀 막은 채 동굴에서 기다린다. 어서 지나가기를… 아직은 젊은 난 그 시기를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삶 속으로 뛰어들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빠져든 허망함에서 탈출하기란 여간 힘든 법이 아닌가보다.

연극 ‘낮잠’(허진호 연출)의 주인공 영진(오광록)은 정년퇴직 후 고향에 위치한 노인 요양원에 몸을 맡긴다. 30년 넘게 직장에 헌신한 끝에 그에게 남은 것은 당뇨와 심근경색, 요실금 그리고 약간의 퇴직금뿐이다. 아내는 먼저 저승길에 올랐고 자식들은 지들 먹고살기 바쁘다. 요양원은 삶의 의욕을 잃은 그가 찾은 자신만의 동굴인 셈. 그렇게 지내길 몇 년. 영진의 동굴에 별빛이 찾아든다.

무료하게 일상을 보내던 차에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이선(서지영)이 요양원에 들어온 것. 그녀는 치매를 앓고 있어 영진을 가끔 아버지로 착각하지만, 어떠랴. 새삼 가슴이 떨려오고 의욕이 샘솟는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죽마고우이자 요양원에 함께 기거하고 있던 동필(박수영)이 끼어든다. 동필도 이선을 흠모했었다. 영진과 동필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이선의 사위가 요양원 보증금을 노리고 그녀를 요양원에서 빼내가려 한다. 영진과 동필은 이선을 지키기 위해 한 팀이 된다.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던 영진은 동필의 조언대로 이선과 결혼하여 그녀의 보호자가 된다. 이선의 치매는 점점 심해지고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지만 영진은 행복하다. 그에게 이선은 여전히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읊던 아리따운 여고생이고 감히 똑바로 눈조차 마주칠 수 없었던 별 같은 존재다. 마침내 가슴에 품은 별님의 무릎을 베고 영진은 편안한 낮잠에 빠진다. 영원히 깨지 않을 낮잠을…

연극 ‘낮잠’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박민규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감독 허진호 연출로 무대화한 작품이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카스테라’ 등을 통해 스타일리쉬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사랑받은 박민규와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을 통해 담담하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멜로를 선보여온 허진호의 만남은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낮잠’은 박민규가 기존의 문체를 탈피해 황혼의 사랑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려낸 작품. ‘낮잠’을 통해 재미와 눈물이 공존하는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는 허진호는 영화에서 쌓아온 특유의 서정성을 자신의 첫 연극 연출 무대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인생의 황혼기에 학창 시절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면, 청춘의 빛이 퇴색해버린 첫사랑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낄까. 반가울까? 실망할까? 덤덤할까? 초라한 현실에서 과거의 반짝임을 찾아낼 수 있는 순수가 내게도 조금은 남아있으면 좋겠다. 영진이 황혼기에 숨어든 인생의 동굴에서 행복한 마지막 낮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슴 속에 소년이 살아 있었기 때문일테니…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중 -

(3월 28일까지. 백암아트홀. 허진호 연출. 이영하, 김창완, 오광록, 서지영, 김기범 등 출연)

조수현 기자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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