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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낯익은 무대 · 색다른 해석, ‘극단 미추’의 ‘리어왕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에 펼쳐진 10폭짜리 병풍 두 개가 인상적이다. 한 쪽 끝에는 ‘극단 미추’라 적혔고 다른 한 쪽에는 ‘리어왕’이라 쓰였다. 마당놀이로 유명한 ‘극단미추’와 서양의 정통 비극 ‘리어왕’이라 ……. 둘 사이의 거리가 병풍 18폭 만큼이나 멀어 보여서 일까?동서와 고금의 만남 앞에 잠시 어안이 벙벙하다. 일단은 그렇다.

동그란 조명이 병풍을 끝에서 끝까지 훑고 지나가면 본격적인 막이 오른다. 병풍이 걷히면 기둥 네 개가 버티고 서있는 나무 마루와 뒤편의 정원이 보인다. 기둥 사이 사이에는 장소를 구분해 주는 발이 쳐져 있는데, 발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여간 한국적이지 않다. 무대 한 켠에는 가려진 발 뒤에 음악 연주자들이 앉아있다.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가야금이나 소금 같은 전통 악기의 소리가 다 여기서 나온다. 흡사 서울의 어느 궁궐을 연상시키는 무대연출에 공연 전 품었던 의심이 한결 누그러진다.

우리 모두 ‘리어왕’에 안면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그에게 딸이 셋 있다는 것과 그 셋 중 가장 착한 딸은 막내라는 것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이 정도면 주요 인물에 대해서는 잘 꿰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조금 더 보태자면, 리어왕은 늘그막에 딸들의 사랑을 시험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권력을 나눠주겠다는 의도다. 첫째도 둘째도 아버지를 너무 사랑한다. 적어도 말로는 그렇다. 셋째는 ‘할 말이 없다’ 한다. 말은 말일 뿐 자신은 결혼하지 않음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리어왕은 맹랑한 셋째 딸을 내쫓고 모든 권력을 나머지 두 딸에게 넘긴다. 그 후, 두 딸에게 아버지는 처치 곤란의 노인네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극단 미추’의 ‘리어왕’은 두 가지 키워드로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콤팩트한 내용이다. 이병훈 연출은 이번 공연에서 모든 곁가지들을 잘라내고 할 말만 했다. 사실 ‘리어왕’은 인물과 사건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 28개의 주제가 있다고 말할 만큼 겹겹이 두꺼운 이야기다. 그 많은 겹들 중에서 이병훈 연출이 골라 낸 문제는 바로 세대갈등이다. 물론 리어왕과 두 딸 사이의 세대 갈등에는 권력욕이라는, 만고불변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두 딸은 원하는 권력을 손에 넣자마자 아비를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한다. 권력을 얻기 위해 감언이설을 늘어놓던 딸들의 혀는 권력을 얻자마자 독을 뱉는 혀가 된다.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모든 사랑을 품안에 넣고자 했던 왕과 그런 아버지를 권력의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는 딸, 서사의 줄기는 권력과 세대갈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주제는 확실하게 전달된다. 권력의 허망함과 부모 자식의 관계에 대해 재고해 봤을 관객이 많았으리라.

두 딸에게 배신당한 왕은 광기에 휩싸인다.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병풍을 훑던 달빛을 기억하는가. 무릇 달빛은 많은 사람을 미치게 하거나 죽음으로 내몰았다 한다. 물에 비친 달을 보다가 물속에 빠져 죽었다는 이태백처럼. 광기는 이병훈 연출의 ‘리어왕’을 감상하는 또 다른 코드다. 역사는 광기에 관대하지 못했다. 권력은 광인을 격리시키고 짐승 취급했다. 그동안 광인은 비정상의 상징이 되었고 권력은 광인을 희생시키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확실히 했다.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틀 안에 가둬지지 않는 광기는 구속과 비난의 당위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듯 권력의 결과물인 광기가 온갖 권력의 상징인 왕을 휩싼다는 설정은 권력의 허망함과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말로를 잘 부각시켜 준다.
마당놀이에 유능한 극단답게 특정 장면에서의 음악과 배우들 움직임은 작품을 연극과 뮤지컬의 중간에 놓기도 했다. 왕이 광인으로 변하기 전, 무대 위에는 극심한 폭풍우가 지나가면서 스펙터클한 상황이 연출됐다. 이때의 웅장한 음악 연주와 바람에 흔들리는 리어왕의 움직임 등은 연극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요컨대 ‘극단미추’의 ‘리어왕’은 서양의 유서 깊은 이야기를 가야금과 마룻바닥으로 표현 했 다는 점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세대갈등과 권력욕의 문제를 광기를 통해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여타의 ‘리어왕’과 구분된다. 동서양은 서로를 훼손하지 않았고 고금의 이야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시차 없이 이어졌다. 옥의티라면, 작품 초반에 리어왕의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다. 관객에게 등을 보이고 대사를 해야 하는 상황은 이해하지만 극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다소 불편했다. (9월 4일∼9월 10일,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평일 8시 토 3시/7시 30분 일 3시, 1만5000∼3만 원)


박혜진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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