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고집스럽다 못해 미련할 정도로 한 길만을 걸어온 사내가 있다.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그래서 흔적조차 희미해져 버린 ‘라사’의 기억을 끄집어 올린다. 어쩌자고 그는 그 고릿적 기억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무대왼편에 놓여있는 재단대는 그의 고집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양 언제까지라도 굳건히 자신의 본분을 지킬 태세로 묵직하게 놓여있다. 두루루룩 소리내며 돌아가는 미싱은 나지막한 한숨을 토해내듯 느릿느릿 돌아간다. 그의 알량한 자존심은 수선을 기다리는 군복과 단추 떨어진 코트 속에서 점점 작아져만 간다.

바늘 지난 길에 드리워진 남루한 외길인생
사동라사의 주인 임공우는 자존심하나로 라사를 고집해온 융통성이라고는 눈 뜨고 찾아볼 수 없는 외골수다. 양복점도 아닌 라사를 고집하는 그는 지난 5년 동안 양복 맞춤 주문을 단 한 건도 받지 못하면서도 세탁소로 바꿔보라는 사람들의 충고에 길길이 날뛴다. 군복수선이나 옷 세탁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마당에 25년 양복쟁이 인생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전통의 명맥을 유지해나가려는 장인의 깊은 속뜻보다는 완고한 노인네의 그악스러움이 느껴진다. 바로 사서 입을 수 있는 기성복이 즐비한 요즘 “옷에는 지문이 있어이 댄다”는, “옷에는 사연이 깃들어이 댄다”는 소리가 가당키나 한가. “단추 하나를 달 때도 실밥 하나를 맺을 때도 고객의 호흡을 느께”야 하고, “치수 잴 때의 떨림을 기억”해야 하고, “바늘 지난 길에 혼을 담아 보내”야 할 시간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없다. 옷은 날개가 아닌, 단지 입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은 추억이 아닌, 과거의 시간일 뿐이다. 팍팍한 현실과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는다. 숨결 하나하나를 느끼며 만든 양복이 아닌, 손쉽고 빠르게 구입할 수 있는 양복이 지금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임을 임공우는 정녕 모르는 것일까? 그는 이러한 현실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귀머거리처럼 아무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시간을 부여잡으려 한다. 하지만 그의 집념은 시간의 흐름 앞에 서서히 힘이 빠져간다. 그는 로가디스 매장으로 백화점 입성을 앞둔 제자 박승조에게 “세탁소 하면 특별하게 바느질 할 일은 없지?”라는 물음 저편으로 자신의 옷을 제작한다.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양복을 만드는 그의 모습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앞만 보고 내달리는 우리에게 급제동을 건다. 그가 건 브레이크는 우리가 잊고 지내왔던 소중한 것에 대해 다시금 환기시킨다.

완가봉(完假縫)된 대사의 숨은 호흡들과 정지된 시간 속의 타임캡슐들
연극 ‘시동라사’의 호흡은 느리다. 때때로 정지되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인물들은 한없이 천천히 시간의 흐름을 늦춘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오버로크를 박는 정옥의 손길에서, 늦은 밤 불도 켜지 않고 재단대를 어루만지는 공우의 손길에서, 여러 마디의 대사보다도 더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쏟아져 나온 말들은 바흐의 악보 속 숨겨놓은 편지나 주고받는 소주잔으로 흘러들어가 그들의 심연으로 소리 없이 스러진다. 대설주의보 경보를 듣고 옷본을 찢으며 허둥대는 공우의 모습에서는 정옥에 대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밤을 지새우고 돌아온 정옥의 얼굴에서는 풍금 타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소녀의 앳된 얼굴과 첫사랑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가감 없이 그려진다. 유난스러움도 화려한 수식어구도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기에 소소한 울림을 관객에게 전한다.
디테일하면서도 사실적인 소품은 이러한 일상성을 자연스레 부각시킨다. 냄비에서 솔솔 풍겨오는 김치죽의 냄새와 보는 이의 침이 꼴깍하고 넘어가게 만드는 고기 살점들, 그리고 따악하는 소리와 함께 꼴깍꼴깍 소리 내며 잔에 채워지는 소주는 무대 한 자리에 껴서 그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게끔 유혹한다. 징하고 울리는 다리미 소리와 드르르륵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는 실제로 강원도 시동의 한 라사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한껏 자아낸다. 맛깔 나는 배우들의 연기는 소극장의 매력을 한층 더한다.

작품과 연기와 소품의 완벽한 삼위일체는 임공우의 고집스럽고 괴팍한 인생살이를 끈덕지게 설득해낸다. 없어질 것이 자명한 시동라사. 하지만 이들의 삼위일체는 어쩌면 시동라사는 영원히 그대로 남게 될지도 모르리라는 확신을 관객들에게 조심스레 심어놓는다.


박소연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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