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가 사라진 지 오래인 이 시대에 자신이 ‘라만차의 기사’라 주장하는 노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돈키호테’. ‘돈키호테’는 풍차를 요망한 괴수라 이르며 싸우고, 낡은 주막집을 성이라 칭하며, 여관집 하녀를 레이디 둘시네아라 부르는 이상한 노인이다. 타인의 손가락질과 세간의 미심쩍은 눈길을 외면하고 마냥 정의감에 불타는 ‘라만차의 기사’에게는 언제나 시종 하나가 따라다닌다. 그는 바가지를 그대로 엎어놓은 듯 찰랑이는 흑발머리에, ‘약간 모자라지만 착하고 순박한’ 든든함을 갖추고 있다. 주인만큼 바보 같지만 사랑스러운 이 시종은 그 이름조차도 자신과 똑 닮은 ‘산초’다.

좋은 데는 이유가 없다, ‘산초’

‘돈키호테’는 기사가 사라져 버린 시대에 자신을 기사라 칭하고 다니는 미쳐버린 귀족 ‘알론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제구실이 무색한 창과 찌그러진 검을 들고서 세상의 악행에 맞서 싸우겠다며 무작정 길을 떠난다. 가시밭길 같은 여행길에는 뒤뚱뒤뚱한 걸음과 마냥 해맑은 얼굴로 그의 뒤를 따르는 시종 ‘산초’가 함께한다.

‘산초’는 세상의 시각에서 미쳐버린 주인을 충직하게 모신다. 주인이 구박하고, 때리고, 소리쳐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돈키호테’의 곁에 머무는 이유를 굳이 따져본다면 ‘그냥 좋아서’다. ‘산초’는 여관의 하녀 ‘알돈자’가 던진 “왜 저 사람하고 같이 다녀요?”라는 질문에 배실 배실 웃으며 “아주 간단하죠!”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상세한 이유를 생각해 내려 해도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머뭇거리며 그의 입에서 겨우 터져 나온 말은 또다시 “좋으니까”다.

‘산초’가 ‘돈키호테’에 대한 마음과 감정을 말하는 ‘I like him’은 익살스러운 가사와 함께 ‘산초’의 우직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고스란히 배어나온다. ‘손톱을 하나씩 뽑아도’, ‘껍질을 벗겨 내도 좋다’고 말하는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산초’를 이해를 할 수 없는 ‘알돈자’가 의미심장하게 던진 “그래서 당신이 뭘 얻지?”라는 질문에도 대답은 오로지 하나다. “좋으니까”. 좋아서 좋은데 어떻게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주인이 싸울 때도, 여인에게 마음을 전할 때도, 기사 작위식을 할 때도, 길을 떠날 때도 언제나 ‘돈키호테’의 옆에 있다. 물론 넘어진 ‘돈키호테’의 굽은 허리를 부축해 주는 것도 언제나 ‘산초’다. 그는 누구보다 ‘돈키호테’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그의 꿈을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다.

‘산초’가 ‘돈키호테’에게 느끼는 끌림은 어떤 것일까. ‘돈키호테’가 가진 꿈을 향해 나아가는 거침없는 용기, 모두가 포기할 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의로움,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 진심으로 두 눈을 반짝일 줄 아는 열정이 그의 가슴 속에 ‘동경’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서 꿋꿋이 자신의 가치를 지켜가는 이에 대한 ‘숭고함’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비현실적일 만큼 현실적인 세상에서 혼자 ‘정의’를 외치는 ‘돈키호테’에게 ‘동정’을 느껴서일까.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보다 보면 ‘산초’와 미묘한 교감이 이뤄지는 순간이 있다. 솔로곡 ‘I like him’을 부르며 “좋으니까”를 외칠 때,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알론조’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일으켜 세우려 할 때, 묵묵히 ‘돈키호테’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미소 지을 때 등은 혹시 지금의 나도 ‘산초’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산초’는 현실로 인해 정의, 꿈, 희망, 사랑 등의 가치에서 살짝 비켜선 수많은 이들이, 세상의 수많은 ‘돈키호테’들에게 보내는 ‘깊은 애정의 눈길’과 맞닿아 있다. ‘산초’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관객이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눈과, 그가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눈길이 다르지 않아서가 아닐까.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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