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플라타너스가 학교 운동장 귀퉁이를 눌러 단풍물을 노랗게 들일 즈음, 학교에선 체육대회나 학예회 같은 교내 행사가 열리곤 한다. 강원도 홍천군 화내면 주음치리에 화촌 초등학교에서도 가을 학예회가 열리게 되었다. 나는 같은 반 친구의 반주로 노래를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아들인 희택이었다. 그 아이는 피아니스트보다는 과학자나 수학자가 더 어울릴 것 같은 무척 학구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기억으론 공부도 피아노도 잘 치는 지금으로 따지면 엄친아였던 것 같다.

나는 학예회를 준비하면서 노래할 때 입게 될 드레스를 앞집에 사는 2살 어린 동생에게서 빌렸다. 그 드레스가 내 생애 첫 드레스였다. 은은하고 뽀오얀 광택이 감도는 분홍빛 드레스. 같은 빛깔의 리본이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고,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레이스가 어깨를  둘러 안고 있었다.

처음 드레스를 입어 본 날, 동생의 옷이라 치맛단이 발목위로 깡총 올라와 보기에 어색했다.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는 그 은은한 분홍빛에 마음이 폭 빠져 거울 앞에서 해종일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엄마는 치마 밑단에 영국황실의 문양 같아 보이는 하얀 레이스를 달아주셨다. 바닥에 다일 듯 말 듯 끌리게 된 드레스. 가슴이 벅차올라 내일 이라도 당장 무대에서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러고 나면 드레스와 이별이란 생각에 학예회 날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랬다.

학예회 날. 공연 날 까지 내내 날 설레게 했던 그 분홍 드레스를 입고, 어린 모차르트 닮은 희택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 정작 그 날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노래한 그 날, 그 날이 바로 나의 첫 콘서트였다. 그 날의 흥분은 잊지 못한다.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느껴본 긴장감.

그 분홍 드레스를 입고 노래한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매 공연,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의 인생의 이야기를 입고서 무대에 오른다. 관객들은 내가 무대에 서는 순간 무대의상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무대의상은 나의 첫 표현이고 관객들과의 첫 대면, 첫 소통이다. 평범한 일상 속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마법장치.

글_뮤지컬 배우 이연경 yklee81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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