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모리스 베자르는 1975년부터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기 원하는 무용단에 자신을 대신하여 표트르 나델리라는 무용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베자르가 자신의 대표작 ‘볼레로’를 감히 지구 반대편에서 공연하도록 허락한 것은 이 표트르 나델리라는 인물에 대한 신뢰가 근거되었기 때문이다. 나델리는 베자르의 생전에는 물론, 베자르의 사망 이후 그의 작품을 가장 정확하게 재연할 수 있는 무용가로 남아있다. 베자르의 가장 위대한 무용수 조르쥬 돈의 출현 이전 이미 베자르의 러브콜을 받아 무용수로도 세계적 위치에 있었던 그가 젊은 나이에 지도자, 기획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뜻밖의 행보였으나, 남성무용수의 은퇴후 진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좋은 예를 보여준 나델리는 미래를 준비하는 영리한 무용가였던 것이다.
표트르 나델리는 폴란드에서 태어나 1971년 바르샤바오페라에서 발레 교육을 마친 후 무용수로 활약하다 20세기발레단의 감독 모리스 베자르를 만났고, 이후 브루셀 ‘무드라 스쿨’에서 정규 교수진의 일원이자 20세기 발레단에서 지도자가 되었으며, 현재 파리오페라 발레단,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몬테카를로 발레단 등 세계적인 발레단의 초청으로 발레 지도자이자 안무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10년 5월 어느 날, 국립발레단을 위해 입국한 표트르 나델리를 만나 그의 춤이야기는 물론 우리가 몰랐던 <볼레로>의 역사를 들어보았다. 사실 필자에게 표트르 나델리는 특별한 기억을 남긴 무용가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0년 여름,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페르피냥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2주간 그의 레퍼토리 수업을 들었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델리는 몸에 붙는 흰 티셔츠와 티끌하나 묻지 않은 흰 바지,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는 미소에 어울리는 갈색 곱슬머리로 필자뿐 아니라 그 수업을 듣는 모든 여인들을 반하게 만들었었다. 2010년, 갈색머리칼은 이제 백발이 되었고, 흰 연습복을 고집하던 날렵한 몸은 후덕한 점퍼차림의 노인이 되어있었다. 복도를 함께 걷는 동안 그의 다리는 절룩거리기까지 했다. 20년 후의 나델리를 보는 것은 인디에나 존스에서 해리슨 포드의 주름살을 보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미소와 유머, 세련된 패션 속에서 자신의 춤철학을 말하는 그는 비주얼이 아닌 춤에 득도한 또 다른 영웅으로 다가왔다.
(다음은 월간 <춤과 사람들> 2010년 5월호에 게재된 글의 일부이다.)
한국의 발레에 대해 얼마나 알고계신가요?
국립발레단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 솔직히 그들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먼저 이해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을 알기 전에 어떤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나눠야할지 몰랐던 것처럼 말이지요. 특히 이번에는 공연을 맡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용수들을 위한 트레이닝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어떤 메서드의 수업을 하시나요?
- 저의 수업은 여러 가지가 섞여있습니다. 다양한 무용학교의 메서드를 섞어서 진행합니다. 세계 여러 발레단과 레퍼토리 작업을 함께 하면서 깨달은 저의 비법은 무용수가 어떤 사람들이냐에 따라 지도방법을 맞춰가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춤스타일을 말해주세요.
- 어렸을 때 바르샤바에 있는 무용학교에서 페째르부르그 출신 선생님에게서 바가노바 스타일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 때의 기초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다양한 무용단의 춤과 다양한 교육법을 배웠어요. 5년간 쿠바에도 있었고, 미국인 로잘라 하이타워와, 프랑스의 롤랑 쁘띠에게도 배웠습니다. 볼쇼이와의 오랜 작업으로 아사프 메세러의 스타일도 배웠어요. 그 결과 각각의 테크닉에 해로운 것은 없었지만 ‘더 좋은 부분’과 ‘덜 좋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교육 방법은 내 스스로 터득한 좋은 점들을 모아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무용수들이 바가노바 교육을 진리로 삼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 어린 시절 저도 배웠고 좋은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바가노바 책을 독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10년간 테크닉이 많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에는 안 좋은 쪽으로 변한 것도 있더군요. 이것도 하나의 현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변형을 보완해서 무용수의 균형을 위해 좋은 방법을 찾아 가르칩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방법이든 옳고 그름의 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용수에게는 자기만의 세계를 갖는 ‘예민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가노바의 교육이 키로프의 공연으로 그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처럼 각각 다른 나라의 다른 스타일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모두 쓸모가 있기 때문이죠.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국립발레단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 며칠간 수업만 하느라 공연연습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수업 후에 솔로 바리에이션을 위주로 지도하면서 발레단의 특수성, 오리지널리티를 느끼고 있습니다. 마치 전구를 켤 때 번뜩이는 것처럼 무용수들의 태도가 적극적이고 생각이 열려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테크닉 이외에 어떤 것을 강조하시나요?
- 무용은 힘든 예술입니다. 종합예술이므로 당연히 음악성, 공간에 대한 이해는 물론 좋은 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에스프리esprit’가 없다면 모든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무용수의 정신세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현재 무용계에 대해 좀 불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클래식 발레 쪽을 보면 테크닉에만 집중하다보니 공연에 대한 정신적인 면을 등한시하고 있고, 현대무용은 많이 진화했지만 이미 전에 본 것들을 하고 있어요. 모리스 베자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전통이란 존중해야하지만 강이 흐르듯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새 길을 트지 않고 고여 있는 춤은 고여 있는 물처럼 진화가 없을 것이다.”라고요.
한국에서 본인을 어떤 사람으로 소개하고 싶은가요?
- 나는 무용 교육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은 의사, 치료사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우리 몸과 정신을 컴퓨터와 같다고 봐요. 우리가 배운 프로그램들이 깔려있지요. 프로그램끼리 충돌되어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많아지면 고치기보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까는 것이 더 쉬운 해결법이 됩니다. 저는 무용선생이면서 어려움을 겪는 무용수의 몸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까는 치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당신의 춤인생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 저는 춤을 늦게 시작했습니다. 폴란드에서 11살은 늦은 나이거든요. 제가 워낙 악동이어서 집에서 감당하기 힘들어하셨다고 해요. 고민 끝에 삼촌께서 저를 서커스 학교에 보내려고 하셨지만 혹독한 곳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는 두려워하셨어요. 마침 아버지가 알고 계시던 발레학교 교장선생님이 계셔서 그리로 보내졌습니다. 저는 곧 얌전한 아이가 되었고, 발레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 후 바르소 국립오페라단에서 5년간 솔리스트로 춤추었지만 당시 폴란드는 폐쇄적 국가였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로젤라 하이타워가 감독으로 있는 마르세이유 발레단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곳에서 롤랑 쁘띠가 안무가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까르멘> <별들을 밝혀라> <파리의 불꽃> 등 자연스럽게 그의 신작들에 출연하는 행운도 경험했습니다. 그 다음 스톡홀름 왕실발레단으로 옮겨있었는데, 1973년 모리스베자르를 만나서 그의 20C발레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젊은이인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 발레단과 함께 내 인생을 마감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만큼 베자르의 춤에 매료되었던 것이죠.
베자르의 <볼레로>는 당신에게 특별한 작품이지요?
- 저에게 지도자의 길을 열어준 작품이니까요. 모리스 베자르가 자신의 <볼레로>에 볼쇼이의 수석무용수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마야 플리체스카야를 출연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볼레로>를 볼쇼이에 가져가서 추게 해달라고 제안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의 문화부장관이었던 여성 풀츠바는 <볼레로>가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절대 러시아에서 공연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마야의 고집도 꺾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해결책으로 볼쇼이 발레단을 호주에 데려가서 공연하게 했습니다. 그 때 안무를 주고 트레이닝을 시켜 무대에 오르게 하는 일을 제가 맡았었어요. 그 <볼레로> 공연을 통해 베자르는 나에게 교육자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고스란히 전수하고 연습시키는 일을 맡긴 것이죠. 차츰 저는 이 일을 즐기게 되었고 가르치는 일이 나에게 맞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무대에서 춤을 추기는 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교육자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어요.
<볼레로>는 조르쥬 돈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 <볼레로>는 원래 여자무용수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초연은 1961년 듀스카 시프니어스(Dushka Sifnios)라는 무용수가 춘 솔로였어요. 그 후 20년간 여자만 추었어요. 그런데 80년대 초 죠르쥬 돈에게 볼레로를 추게 하는 파격을 시도했지요. 그 이전에도 유명한 작품이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화제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재미있는 일은 그 때 베자르는 조르쥬 돈과 상대되는 배경의 무리들을 여성들로 바꾸는 것이 맞다고 여겼어요. 여성이 솔로를 출 때 남성들이 배경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조르쥬 돈의 성별과 상관없이 남성 무리들의 움직임이 음악과 안무에 더 어울렸기 때문에 베자르는 조르쥬 돈과 여성 무리들의 초연을 후회했고, 그 다음 공연부터 지금까지 남성들로 굳혀졌죠. 안무는 지금까지 한 동작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파리오페라를 제외하고 다른 무용단에서 여자가 솔로를 춥니다.
교육자로써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 1979년 저는 춤추기를 그만두고 앙드레 제임스키라는 친구와 함께 ‘발레또 마니아’라는 무용 스튜디오를 벨기에 브뤼셀에 열었습니다. 그런데 베자르가 자신의 ‘무드라’학교의 교사를 제안했고 20C발레단의 교사로도 초청했습니다. 물론 제안에 응했지요. 그의 레퍼토리를 여러 발레단에게 지도하면서 스투트가르트 발레단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스투트가르트에서는 <파리의 생활>이란 작품을 마샤 하이데에게 전수하여 멜버른 시드니 코펜하겐 등에서 공연했고, 그 후 파리오페라발레를 위해 베자르의 대작 베토벤<심포니 9번>을 전수했습니다. 이 작품은 저에게도 특별한데 150여명이 무대에 출연하는 것으로 무용수만 75명이 등장하는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이 공연으로 저는 베자르의 레퍼토리를 가르칠 수 있는 최고의 선생으로 인식되었고 다양한 무용단에서 초청교사 제안을 받았습니다. 스투트가르트, 베를린, 핀란드 국립, 스톡홀름 로열, 멕시코 벨라자르떼, 리오데자이로 시립, 파리오페라, 도쿄발레, 라스칼라 몬테카를로 등에서 교사와 작품 전수, 기획 등의 일을 했습니다.
베자르의 작품가운데 개인적으로 애착을 갖는 작품이 있나요?
- 그의 많은 작품을 좋아합니다. <봄의 제전>도 멋지고 <9번 교향곡>은 정말 최고입니다. 그 밖에 <사랑이 내게 말하는 것>과 말러<3번 교향곡>등을 좋아합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 지금은 한국의 국립발레단에 집중하고 싶어요. 앞으로 몇 년 간 계획이 너무 꽉 짜여 있어서 다른 일을 계획하기란 쉽지 않아요. 저에게는 젊은 무용수들을 가르치면서 에너지를 받는 이 일이 가장 멋지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하고 있어요. 매번 새 프로젝트를 기다리는 것이 저에게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한국을 떠나면 폴란드 TV에 방영될 작품을 안무해야하고, 시체이친에서 콩클심사를 해야 합니다. 그 후 헬싱키에 가서 핀란드 국립발레단을 지도해야 해요. 이렇게 세계 곳곳을 도는 변화무쌍한 삶 때문에 일상의 지루한 반복은 나와 먼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떠도는 생활에 대해 가족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 저는 결혼하지 않았어요. 저의 가족은 무용 연습실입니다. (웃음) 너무 상투적인 대답인가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춤은 당신 인생에서 무엇인가요?
- 내 인생 자체가 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죠. 춤은 저에게 취미이자, 늘 생각하는 것이고, 여전히 나의 꿈이기도 합니다. 저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춤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_김예림 무용평론가 yelim110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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