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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1920-30년대를 다른 시각으로 조망하는 시도들이 많다. 국사책에서 보던 뼈아픈 식민통치의 기억을 잠시 뒤로하고 개화에 대한 의지로 가득 찬 당대의 역동성에 주목하고 있다. 개화기라 하면 ‘모던뽀이, 모던걸’들의 ‘연애’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구보’라는 호로 더 유명한 소설가 박태원,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천재 시인 이상, 매일신보 기자이자 소설가였던 정인택 세 남자가 까페 여급 하나를 두고 실제 벌였던 사각 ‘썸씽’이, 2008년의 연극 무대위에 올랐다. 두산아트센터 창작자 양성의 세 번째 프로그램인 “깃븐우리절믄날”이 바로 그것이다. 1935년, 독한 연애에 빠진 네 청춘남녀들의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때는 바야흐로 봄날이니, 미스꼬시 백화점 옥상 다실에 앉은 구보가 여유롭게 고히(커피)를 마시고 있다. 객석 쪽에서 이상이 등장한다. 멜빵을 매고 면도하지 않은 얼굴을 한 그는 의기양양 걸어 들어와 구보 옆에 앉는다. 여급을 희롱하며 일본어로 고히를 주문한다. 비록 창작된 시나리오에 의한 배우들의 연기이지만 구보와 이상의 대화를 엿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뛴다. 거기다 그들은 30년대 경성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어와 불어까지 섞어가면서 천연덕스레. 생소한 단어들은 무대 배경 스크린에서 친절하게 자막설명이 뜨고 있다. 여기까지가 이 연극을 아우르는 기본설정이다. 극의 공간은 항상 어느 건물의 ‘옥상’으로 고정되어 있다. 구보가 유별나게 옥상을 좋아하는 취향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장소는 종종 문학에서 중요한 상징을 가진다. 특히 그 유명한 미스꼬시 백화점의 옥상은 이상이 ‘날자꾸나!’ 하며 존재론적 변환을 시도하던 곳임을 기억 할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공간, 수직의 상승욕구를 온 존재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열린 옥상에서 네 남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과연 이들은 날아오를 것인가, 추락할 것인가.
세 남자의 사랑을 받는 행운의 여인은 가훼(카페) ‘쓰루(鶴)’의 여급 권영희이다. 고운맵시의 손동작을 자랑하는 그녀는 모든 모던보이들이 선망하는 모던걸이다. 개량한복 밑에 드러난 하이힐과 화려한 핑크빛의 투피스 등은 당시 신여성의 대표적 의상을 보여준다. 임신한 아내가 있는 박태원도, 만년 2등만 하는 소심한 정인택도, 여성편력을 자랑하는 자유인 이상도 낭랑한 목소리로 미소 짓는 그녀에게 연정을 품는다. 이상과 교제를 하게 된 그녀는 정인택이 자살시도를 한 후 정인택과 결혼한다. 이 사건을 두고 구보는 이상과 권영희가 벌인 연극이라 생각하고, 이상은 반대로 정인택과 권영희가 꾸민 일이라 여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교차되는 사건과 대화 속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의도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면 대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꼽는 그들의 개화기적 포즈 자체? 연애와 사회를 오가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 그것도 아니면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다만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이라는 오래된 철학에 대해 또 이야기하려는 걸까.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담아내려 한 연출자의 넘치는 열정이 도리어 아쉽다. 당시 경성의 개화바람과 연애열풍, 감칠맛 나는 말맛으로 풀어낸 대화, 식민시대 지식인의 내적 갈등, 근대화와 노스텔지어의 이중적 화두, 비밀로 얽히고설킨 청춘 연애담 등 두 시간 안에 소화해 내기엔 벅찬 많은 포커스들이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같은 이유로, 극은 하나의 일관된 분위기를 형성하지 못한다. 시공간의 변화를 알리는 무대 점등시간동안 극장 안에는 경쾌한 30년대 음악이 울려 퍼진다. 박태원의 버릇인 기괴한 웃음소리나 여급 권영희의 풍자적 말투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예술적 재능을 펼치기에는 너무나 갑갑한 경성이라든지 사랑의 서사에 번번이 실패하는 이상의 우울, 모던함의 추구 이면에 드러나는 허세의식 등은 당대 사회의 어두운 일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한 두 가지 코드 속에 관객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다. 때마침 옆 좌석 커플의 대화가 들려온다. “이거 주인공이 이상이야, 구보야?” 서사의 중심을 잘 못 잡았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이상으로 분한 배우 전병욱의 건강함은, 허무주의와 광기에 휩싸인 초췌한 이상을 기대했던 적지 않은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준다. 성기웅 연출의 경성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나온다고 하니, 막강한 내공 위에 완급과 강약 조절이 잘 된 새로운 경성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아쉬운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우리의 인생인가 싶기도 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끝나버리는 한편의 연극과도 같은 인생. ‘깃븐우리절믄날’에서는 유독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개화기 조선을 휩쓸었던 연애 열풍은 암울했던 삶을 잊기 위한 도피처였다. 사랑 그 자체의 사랑이 아니라 근대의 생산물이며 유행으로서 소비되는 상품이었다. 극에서 구보는 “숨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행복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고 삶은 “그저 명랑하구 행복된 그런 생활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을 각오를 하고 약을 삼키게 하는, 유부남의 마음에 봄바람을 일으키는, 사나이들의 우정을 흔들리게 하는 지독한 사랑은 그저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소박한 축원의 발로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랑에 무엔가 위대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혹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심각한 정의에 도전하는 아무개에게 “깃븐우리절믄날”이 말한다. 우리의 인생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여태 밝혀낸 자 드무노니, 상관없이 그저 행복하여라! 행복하기만 하여라. 그저 날갯짓만으로 어여쁜 젊은이여.
박치연 newstage@hanmail.net 사진 김고운기자 vortexgon@korea.com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