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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의 희곡읽기 20] 사랑을 대하는 자세

 

해마다 입시 때가 되면 연극영화과 실기 현장에서 자유 독백으로 준비한 대사를 읊조리는 공연지망생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가장 빈번한 대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날 위로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로 시작되는 알마의 독백. 테네시 윌리엄스의 <여름과 연기>의 한 대목이다.

“날 위로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왔으니까. 진실을 얘기하자고 했죠? 그래요. 그렇게 하죠. 숨김없이, 솔직히, 부끄러움도 없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에요. 비밀이었던 적이 없었어요. 당신에게 돌로 만들어진 천사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읽어보라고 했던 그때 난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는걸요. 그래요, 우리 어린 시절의 그 기나긴 오후들. 집에서 노래 연습을 할 때 당신 친구들이 “죠니, 죠니!”하고 당신 이름을 부르면 그 소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죠. 난간을 뛰어 넘어가는 당신을 보러 얼마나 빨리 창가로 뛰어 갔던지! 당신의 빨간 스웨터를 쳐다볼 수 있다면 하고 골목 끝에 서있기도 했어요. 그래요.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이 사랑은 나를 사로잡았고 이 사랑의 고통은 시작됐고 그때부터 이 병은 악화된 거죠. 내 일생의 하루하루를 당신 옆집에서 살았어요. 당신의 그 위력, 당신 자체를 숭배하면서 나약하고 분열된 인간으로. 그래요. 이게 제 이야기예요. 이젠 당신 얘기를 하셔야죠. 우리 사이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난 왜 실패했어요? 당신은 왜 거의 가까이 왔다가 끝내는 가까이 오지 않았죠?”

이 극 <여름과 연기 SUMMER AND SMOKE>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인 테네시 윌리엄스(Thomas Lanier Williams, 1911-1983)의 작품이다. 그는 1911년 미시시피주 콜럼버스시에서 태어났다. 술과 포커를 즐기는 아버지와 목사의 딸이자 남부여인의 전형이었던 어머니의 성격차이로 가정생활은 평탄치 못했으며,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으로, 어머니는 ‘청교도적 공격성’으로, 서로와 그 자식들에게 평생 고난의 ‘십자가’가 되었다. 여기에 정신분열증으로 늘 윌리엄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아름다운 누나까지 합쳐져서, 대단히 ‘극적인’ 파괴력을 가진 윌리엄스 가족을 완성한다. 1929년 윌리엄스는 미주리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재정사정으로 중퇴하고, 다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1938년 아이오와 대학을 졸업한다. 미주리대학시절부터 극작을 시작했으며, Tennessee Williams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뉴올리안즈로 이사한 이후이다. 1940년 프로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가 보스턴 소재 Theatre Guild 공연에서 크게 실패하자, 이후 몇 년간 MGM 영화사에서 일하면서 차기작 준비에 몰입한다. 1943년부터 1948년 사이 그는 <유리 동물원 THE GLASS MENAGERIE>,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여름과 연기>를 발표하였으며, 이 남부 3부작(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비평가들과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현대 미국희곡작가로서 윌리엄스의 명성을 구축하였다. 윌리엄스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폭발적인 관객반응에 힘입어 초연 시에만 855회(거의 2년여)공연이라는 전설을 이루어내며, 마침내 퓰리처상까지 수상, 그 세계문학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 1948년 이후 약 10여 간이 윌리엄스의 전성기로, 24편의 희곡을 포함하여 엄청난 분량의 저작들을 발표하였으며, 세계적인 명성과 상업적 성공을 겸하여 누리게 된다. 하지만 1961년 <이구아나의 밤 NIGHT OF THE IGUANA>이후 별다른 성공작을 내놓지 못하였고, 1963년 오랜 동성연인이자 친구, 인생의 동반자였던 프랭크 멀로가 폐암으로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극심한 약물/알콜 중독과 우울증에 빠져 근 10년간 아무런 주목할 만한 저작도 내놓지 못하는 마비상태(스스로 ‘Stoned Age\'라고 불렀다)에 빠지게 된다. 1970년대 이후 다시 규칙적인 습작생활로 복귀하여 사실주의계열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극적 실험들을 시도하였으나 비평가나 관객 모두에게서 외면당하였다. 1979년 자신의 거주지 도로변에서, 동성애 반대자들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이 다시 악화되었으며, 연이어 1980년 의 브로드웨이 초연(윌리엄스 생애 최후의 공연작이 되었다)마저 참패로 끝나자 더욱 술과 약물에 의존하였다. 1982년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 약병 뚜껑이 목에 걸려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12장으로 구성된 <여름과 연기>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들이 남부의 몰락한 계급을 그리고 있는데 반해 영혼과 육체의 갈등이라는 보다 근원전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이면서도 자주 무대화되지 못한 작품이기도 하다. 스페인어로 영혼을 뜻하는 알마는 한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존에게 사랑을 느끼며 혼자서 사랑을 키운다. 목사인 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부양하며 노처녀 피아노/성악 선생으로 고독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 앞에 부친의 뜻을 이어 의학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존. 애써(정말 그녀로서는 온힘을 다해) 그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녀를 여자가 아닌, 순수의 상징으로만 바라보는 존은 결국 그녀의 제자인 넬리와 결혼한다.

“겨우 서너 번 정도밖에 안돼요. 우리가 얼굴을 마주한 건. 그때마다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썼던 것 같아.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육체에 대한 갈망은 아니었어. 비록....내가.....신사가 아니었던 그날 밤에도.....카지노에서 말이야....마치 내가 원하는 게 그런 줄 알고 행동했지만 정말로 내가 원했던 것은 육체의 당신이 아니었어.”

필자 역시 이 작품을 그 “유명한” 알마의 독백으로 먼저 접했다. 그때만 해도 한 남자에게 갖는 사랑을 넘어선 집착으로 알마를 바라보았다. 집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을 뜻한다. 알마의 상태가 그렇게 보였다. 그러다가 이 작품 전체를 읽고 극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녀의 사랑이 우리가 흔히 안고 사는 질문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우리가 사랑에 대처하는 방식 중 하나를 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의 대상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온 정신을 쏟는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만큼은 숭고하고 고상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거기서, 육체적인 사랑과 영혼의 사랑을 두고 갈등하게 된다. 알마 역시 자신의 구속적인 처지에서 사랑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한다. 극이 전개되면서 그녀의 구속은 자유의지로, 반면 존은 자유에서 정착의지로 변해간다. 자기 자신에 눈뜨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에게 접근했던 두 젊은이는 고통을 맛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참담한 아픔을 겪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를 찾기 위한 탐색의 몸부림을 보인다.

“우리 대부분은 헛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억압을 풀어헤침은 곧 본래 자신의 모습대로 사는 것이고, 그러한 노력이 계속 시도될 때 언젠가는 자기의 올바른 자리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된다. 아직도 더 많은 고통과 방황이 뒤따를지라도 그녀는 자신의 삶의 길을 되찾을 수 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자리를 바꾸어버릴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는 서로 보완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내 육체가 당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방금 제 맥박을 잰 사실에도 불구하구요. 그래, 그거네. 회피하고 싶었겠지만. 다 털어 놓았어. 자리가 바뀌었어. 그래요, 자리가 백팔십도 완전히 바뀌었어! 당신은 예전에 내가 생각하는 식으로 나는 당신의 생각으로. 두 사람이 동시에 상대방을 찾아 나섰네요. 서로 둘 다 외출중이라 문이 잠겨 버렸죠. 나는 당신에게 신사라는 거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을 하러 왔더니, 당신은 내게 숙녀로 남으라고 말하고 있다니. 문자 그대로 자리가 완전히 뒤바뀌었네!”

때문에 알마가 외로운 세일즈맨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그녀를 지켜주던 천사상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떠나는 모습에서는 씁쓸한 느낌을 갖기 보다는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게 위를 향해 있어요. 돌들이 그 무언가에 닿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웅장한 스테인드글라스 창, 거대한 둥근 문들. 아치형 천장과 그 모든 것들은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에 닿으려고 위를 향하고 있어요. 저한테는 그게 비밀이면서 존재의 이면에 있는 원리에요. 인간의 한계를 넘어 선 뭔가를 향한 영원한 투쟁과 열망... “우리 모두 시궁창에 빠져있다. 허나,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노라.””

사실 이 극을 떠올린 건 퍽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얼마 전 우연히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 Because I Said So>라는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유치한 제목 탓에 별뜻없이 보고 있었는데 주인공인 엄마(다이안 키튼의 연기만 놓고 보면 볼만은 하다)가 사랑에 방황하는 딸에게 해주는 충고.. “네가 꼭 가져야하는 것과 너 사이에 자존심이 끼어들 때면 그건 잊어버려. 그렇지 않으면 테네시 윌리엄스의 주인공처럼 슬픈 인생을 살게 될거야” 자존심 운운하던 대사가 바로 이 <여름과 연기>에서 나왔고 테네시 윌리엄스의 주인공이라면 알마를 가리킬 터.

제목에서 여름은 사랑의 열병이요, 연기는 사랑이 타고난 후 남은 재다. 이 무서운 장마가 지나고 잠 못드는 여름밤으로 접어들 때 가끔 불어오는 미풍에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경험을 한 번은 해봤을 것이다. 그때 마음에 침입해 들어온 자를 주목한다면 알마의 사랑의 방식이 조금은 현실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글. 김지명(극단 <표현과 상상> 무대감독) jeem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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