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저 인터뷰 하러 오신 거 맞아요?” 포근하고 두둑한 볼로 잔뜩 웃으며 디자이너 강기정이 대뜸 묻는다. 갓 사회에 발을 디딘 것처럼 겸손한 그녀의 말과는 달리,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하다. 인터뷰 당일에도 “작업 때문에 통 잠을 못 잤다”며 연신 커피를 마시는 그녀는 현재도 각종 연극과 창작 뮤지컬 무대를 넘나들고 있었다. “뮤지컬 ‘언약의 여정’하고 창작팩토리에서 하는 공연 두 작품,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한 작품, ‘오 당신이 잠든사이’하고 ‘두드림’까지 하고 있어요. 겹쳐서 안 하려고 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메인사진_판소리, 애플그린을 먹다)

▶ 혼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어서기

디즈니랜드의 커스톰을 보고 막연하게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게 첫 인연이었다. 무대의상을 디자인하게 된 계기는 배우인 남편과의 만남. 남편의 학교에 놀러 갔는데 연출이 “디자인과를 나왔으니 무대 의상을 해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패션 디자인하고는 다른 장르라며 손을 저은 그녀에게 연출이 건넨 것은 칠 만원 여의 돈. “이 돈으로 민초들의 옷을 만들어 봐.” 남의 학교 작업실에 숨어들어 광목에 염색을 하고 여덟 벌을 완성시킨 게 그녀와 무대 의상과의 첫 만남이다. “그게 연이 돼서 그 학교 학생들이 저예산으로 부르더라고요.(웃음) 술자리도 가고, 배우들 연습하는 것도 구경했어요. 가까이 놀던 친구가 무대 위에서는 확 변하는 게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공연의 매력에 빠져든 거죠.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은 문화센터 가서 뭐 배우는 것처럼 재료비를 대가면서 취미처럼 했어요. 재미있으니까 그래서했죠.”

그렇게 즐거움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혼자 배워나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도 그 당시에 만든 옷이다. “남편 학교 학생들과 만든 공연 중 ‘밀크 우드’라는 작품이 있어요. 그 때는 정말 한 백 벌쯤 만들었어요. 배우가 8명 나오는데 각각 10명 이상의 캐릭터를 소화하거든요. 그때는 돈도 없고 누굴 부를 수 있는 여건도 아니고 제가 다했죠. 재료값도 없었는데 그 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평도 좋았고. 심지어 그렇게 오래 된 일인데 그때 기억을 하고 찾으시는 분들이 있어요. 감사하죠.”

(사진_언약의 여정)

▶ 외로운 밤을 재단하는 작업

“디자이너의 덕목이요? 성실, 정직, 끈기, 부지런함?” 한참을 생각하다 덧붙인 말은 우리나라 공연계 9년 차 스텝의 말답다. “많이 힘들고 실질적으로 큰돈을 벌거나 하지도 않아요. 게다가 배우들만큼 주목 받는 것도 아니고요. 자기가 만족하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으면 힘들어요.”
‘사람들하고 많이 만나겠다’는 질문에 디자이너 강기정은 의외의 말을 던진다. “혼자 하는 작업이 굉장히 많아요. 연습할 때 가끔 가지만 밤새서 옷을 만들고 있을 때는 고독해요. 연출, 배우는 함께 모여서 작품을 만들어가지만, 의상 같은 작업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을 대하고 무리 없이 매끄럽게 하면서도 혼자서 인내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까지.” 밝은 눈빛 아래로 연신 피어오르는 진한 커피 향기가 밤샘작업의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디자이너의 고통을 만나게 한다.

▶ 늘 부족하다는 9년 차 디자이너

장기적인 방향을 물었다. 9년 차 디자이너인 그녀의 바람은 오직 하나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이다. “관객들이 다른 부분은 많이 이야기해주시잖아요. 그런데 의상은 크게 나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요. 열심히 했지만 제가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어시스턴트도 한 번 안 해봐서 더 그래요. 그럴 때가 힘들죠.” 디자이너 강기정의 많은 작업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진행된다. 집에 자주 못 들어가는 이유가 이것저것 시도해보다 그런 거라고 한다. 그녀는 아직도 기꺼이 누군가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 분은 저란 사람을 모르시겠지만 황현희 선생님이라고 계세요. 주변에서는 ‘그 분 제자 있다 너 안 받아준다’, ‘메인 디자이너가 어디가려고 하냐’, ‘잘 하고 있다. 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라’ 그러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그녀의 올해 계획을 들으면 아직도 오랫동안 홀로 서기에 성공한 메인 디자이너로 활동 할 것 같다. ‘왕 세자 구출 작전’, ‘독살미녀 윤정빈’ 등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작품을 하다가 장기적으로는 아카데미 같은 것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한 50대쯤 책을 한 번 쓸 수 있을까도 생각해요. 자료가 너무 없거든요.”

홀로 세운 몸을 오로지 공연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쓰고 싶어 하는 이 디자이너는 무대의상을 앙상블이라고 생각한단다. “무대의상이란 것은 어느 한 사람을 위한 옷이 아니잖아요. 배우, 작가, 연출, 무대디자이너, 관객까지 극에 참여하는 모두를 위한 의상이에요. 그러면서도 제 색깔이 녹아 있어야 하는.” 어느 새 화제가 공연계의 어려움으로 흘렀다. 디자이너 강기정은 “공연계가 커지고 있다고 해도 여러 가지로 힘들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고민을 많이 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 고민을 웃음으로 항복시킨다. “그래도 뭐,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으니까 해야죠.(웃음)” 여전히 공연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웃음이다.


백수향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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