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연한 붉은 빛으로 가득한 무대 위로 흐르는 구음(口音). 구음의 음가로 호흡을 맞추는 메데아와 이아손의 모습은 아담과 이브의 태곳적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두꺼비집’,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고유의 소리로 표현되는 이들의 사랑은 한없는 순수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메데아와 이아손에게 드리워진 운명의 사슬은 이들의 위험한 사랑을 시험하기에 이른다. 오직 이아손의 사랑만을 원했던 메데아는 아버지의 황금 양털을 훔치러 온 그를 위해 하얀 삼베옷 위에 빨간 두루마기를 걸치고는 동생을 살해하고 조국마저 배신해버린다. 이로서 완벽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게 된 메데아는 이아손을 좇아 그의 두 아이를 낳음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만 같은 이들의 사랑은 테바이의 왕녀 글라우케의 등장으로 서서히 균열되어간다. 권력에 눈뜬 이아손은 자신을 위해 고국과 형제마저 버린 메데아를 배신하고는 글라우케와의 결혼을 감행한다. 사랑을 속삭이던 음가의 음률은 흔적 없이 스러져버리고 속절없는 사랑의 한은 굿으로 녹아들어 복수의 칼날을 갈게 한다.

모성 메데아와와 여인 메데아는 씨름 끝에 모두의 파멸을 불어내기에 이른다. 이들의 각축전은 순수했던 시절의 구음과 놀이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로도, 모성 메데아의 위안으로도 정화되어지지 않는다. 깨져버릴 데로 산산이 부서진 사랑의 흔적들은 잔인한 기억으로 메데아의 가슴에 알알이 박힐 뿐이다. 환영처럼 사라져버린 자신의 사랑에 넋을 놓아버린 여인 메데아는 마침내 모성 메데아를 살해해버리고는 파국의 끝을 향해 치달아간다. 빨간 종이인형의 아이들은 갈가리 찢긴 채 물 위에 뿌려지고 정가의 음가는 메데아의 응집된 한(恨)을 극대화한다.

자신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파멸로 몰고 가야만 했던 메데아. 연극 ‘두 메데아’는 그리스 최고의 악녀라 불리게 된 속사정을 압축된 몸짓과 음가로 이야기한다. 황당하고도 잔혹한 운명으로 점철된 질곡의 삶 속에서 그녀는 씻김굿으로 아이들의 넋을 천도하고는 자신 역시 저 먼 저승으로 건너간다.

70여 분간 살아낸 그녀의 생은 악녀라는 칭호를 벗어버린, 한 여인의 지독할 정도로 순수한 사랑으로 메워졌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혹한 그녀의 생은 짧게 살다 간 그녀의 생에 비해 길고도 길었다.


박소연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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