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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 입장했을 때 텅빈 어두운 공터였다. 관객을 향해 흑백으로 프린트된 아시아나 승무원 사진이 실제 크기로 서있었다. 어쩐지 낯선 느낌이긴 했지만 궁상맞고 촌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과연 재미가 있을까?’
故윤영선의 ‘여행’은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50대 후반 중년남성의 죽음에 대한 쓸쓸하고 우울한 감성이 주된 정서였다. 20대 여성인이 느끼기에는 상상의 여지와 짐작으로만 그들의 슬픔에 대해 체감되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럼에도 인식의 귀틍이에 ‘죽음’이라는 언어가 또아리튼 까닭은 무엇일까?
화려한 무대보다, 잘생기고 멋진 배우들보다, 故윤영선의 ‘여행’은 생에 대한 메타포를 던져주었다. 죽은 친구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여행’이 주는 메시지는 죽음의 허무함이 아닌 삶에 대한 강력한 갈증이었다. 그 욕망이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쓰고 작고한 작가의 마음 같아서 묘하게 숙연해졌다. 우리는 종종 밀란쿤데라의 책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시달린다. ‘간접체험’, 즉 타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본인의 죽음 또한 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떤 이는 생에 더욱 강한 집념을 보이고, 또 어떤 이는 그 죽음의 두려움에 주저앉아버리는 것이다.
작품의 매력은 더하는 요소는 단순히 서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탁월한 연출 감각이 빛나는 대목은 등장인물들이 기찻길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이 공간이 ‘기차 안’이라는 사실을 관객이 망각할 즈음 ‘덜커덕덜커덕’ 효과음과 함께, 배우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좌우로 흔든다. 이를 통해 무미건조하고 궁상맞았던 검은색 공터는 기차 안이 되는 마법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저예산 연극에 대한 가능성과 질문도 회자 해봐야한다. 겉치장에 정신 나간 성형미인들 사이에서 기본기에 충실한 가수처럼, 이 작품은 자본에서 자유로운 저예산 연극이 보여주는 자긍심이 보였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본연의 답과 같이 그곳에 모인 모두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흥에 관객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극의 중간 중간 막이 바뀔 때마다 기타연주가 공연의 여백을 채우고, 극 중 죽은 오라버니를 그리며 여동생은 판소리를 하다 울음을 삼킨다. 뮤지컬이 아니라 삶의 노래가 흐른다. 화두는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은 어떠한 죽음’이어야하는지에 대해 작가는 묻고 있다. 죽자마자 3일 안에 장사를 지내고, 가스불로 태워 화장하는 근대적 죽음의 비정함을 지적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사랑하던 가족이 죽으면 꽃가마를 태워 의식을 치러주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곡을 해준다. 장례식을 예식으로써 대우해주며 잔치처럼 사람들이 모여 가족들과 아픔을 나누어주었다. 화장 문화에 대한 실용적인 측면은 지적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자꾸만 ‘여행’에서 기택이가 화장에 대해서 거부감을 건드리자, 다시금 일어나는 자본주의의 죽음방식에 대해 회의가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故윤영선의 ‘여행’은 한마디로 어깨에 힘을 빼고 기본기에 충실했던 한판승의 사나이, 최민호와 같은 작품이었다. 이제 故윤영선의 ‘키스’를 보러가자, 두 말도 필요 없겠다.
심가연 newstage@hanmail.net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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