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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속은 빨갛지 않더냐?, ‘소녀, 악마 그리고 풍차’와 ‘생명수’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끝도 없다.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유행이라는 홍수 속에서 무수한 욕망들과 마주치게 된다. 계절 옷과 최신 핸드폰, 아무리 걸어도 멈추지 않는 쇼윈도 속 넘쳐나는 물건들의 행렬은 끈질기게 당신의 먼지뿐인 주머니를 노크한다.
2008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이 9월 5일부터 10월 30일까지 진행 중이다. 세계 18개국이 참가한 이번 페스티벌에서 프랑스가 준비한 두 작품 ‘소녀, 악마 그리고 풍차’와 ‘생명수’는 우리네 범인들의 얄팍한 속물근성을 꼬집는 연극이다. 10월 11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 두 작품을 만나보았다.

네 속은 빨갛지 않더냐?
‘소녀, 악마 그리고 풍차’, ‘생명수’는 그림형제의 동화를 토대로 프랑스 오데옹 국립극장의 올리비에 피(Olivier Py)가 각색하고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원작의 단순명료한 내러티브에 환상적인 요소와 시사성을 가미해 현대인들의 감수성에도 진한 방점을 찍었다.
첫 째, ‘소녀, 악마, 그리고 풍차’는 가난한 방앗간 주인이 악마와 미심쩍은 거래를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자로 만들어 줄 테니 방앗간 뒤에 있는 것을 달라고 했었던 악마의 말에 그 곳에 있는 것은 사과나무뿐이라고 생각한 방앗간 주인은 승낙을 한다. 약속 시간이 되어 악마가 다시 방앗간으로 찾아들고 선약한 날에 방앗간 뒤에는 방앗간 주인의 외동딸이 서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주인은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된다. 영혼이 맑은 딸이 악마를 계속 물리치자 아버지는 악마의 명령에 따라 소녀의 손을 도끼로 찍어 버렸다. 극장에 진동하는 소녀의 긴 비명 뒤에 그녀의 손목을 들여다보니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붉게 늘어진 혈관만 흔들거리고 있었다. 물욕에 굴복한 아버지의 비정함이 선명한 빨강으로 잔인하게 드러나는 시점이다.
둘 째, ‘생명수’는 한 왕국의 병든 왕이 세 왕자에게 자신의 몸을 다시 일으켜 줄 생명수에 대해 말하자 그들이 차례로 생명수를 찾아 떠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막내아들 빼고는 뼈 속 까지 속물인 왕자들은 길에서 만난 거지를 보고 가난을 최대의 죄라고 말하며 빈곤을 조롱하고 경멸한다. 그들의 행동은 이 사회의 논리- ‘돈 없이는 함부로 입 열지 말라’라는 글귀에 빨간 밑줄을 좌악 그어준다. 그것은 우리 사는 세상이 자본주의의 논리 아래 날개를 펼 수 있는 자유주의 왕국이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하게 했다.

 

 

서커스의 황홀한 입김
‘소녀, 악마 그리고 풍차’와 ‘생명수’를 충만하게 채워주었던 장치로는 황금색이 주조를 이룬 무대 미술과 단조 톤의 멜로디가 특징인 아코디언 연주를 꼽을 수 있다. 화면 전체가 전구로 촘촘히 박혀 있는 조명세트는 분리식으로 되어 있어 파티션처럼 무대의 각 소에 배치되어 원경과 근경을 표현하며 환상적인 공간 연출을 보여 주었다. 또한 조명 세트는 아코디언, 오보에, 플룻, 트럼펫, 색소폰, 호른, 트라이앵글, 북 등을 연주하는 단원들의 붉은 복장과 어우러지면서 프랑스 특유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풍취를 전달했다. 그리고 극 흐름의 고저에 따라 테마 멜로디를 연주했던 아코디언은 배우들의 프랑스어 대사보다 더 능숙하게 관객들을 리드하며 실질적으로 감정선을 조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작품의 우화적인 에피소드들과 조우하여 드라마틱한 연극 무대에 황홀한 서커스의 입김을 불어넣었다.

있는 그대로(自然)에 감동하라
“그렇지 않소. 내 사랑. 난 경이로워 한다오.” 이것은 ‘소녀, 악마 그리고 풍차’의 마지막 구절로 손 잘린 소녀가 수호천사의 도움으로 왕과 결혼을 하고 전쟁터로 떠난 왕과 7년만에 숲 속에서 해후할 때 나오는 말이다. 왕비의 절단된 손목 위에 새 손이 생긴 것을 보고 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자신의 자라난 손을 나뭇잎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당신은 감동 받지도 않지만 나뭇잎들은 매년 그러는 걸요”라고 말이다. 이기적인 인간들의 훼손으로 인해 병들었던 가로수의 나뭇잎들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야들야들한 잎을 다시 틔우듯 아비의 눈 먼 욕망에 절단되었던 소녀의 손도 시간의 손길이 치유하였다. 소멸된 줄 알았던 것을 기적처럼 되살리는 자연의 자비와 치유력이 우주의 미생물인 인간에게도 머물러 주었던 것이다. 연출가 올리비에 피(Olivier Py)는 ‘생명수’에서도 다시 한 번 자연의 경이로운 순환작용과 함께 소유에 대한 덧없음을 언급하였다. 임종을 앞 둔 왕과 막내아들의 대화에서 아버지가 숲의 나무와 소유자와의 관계를 말하며 죽음과 생명의 관계를 설명한 장면이 그러하다. 숲의 나무를 하나 가졌다고 하더라도 소유자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무는 원래 자신의 자리인 숲에 있어야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 법. 가져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하고 미련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의 주인은 나무에 대해 소유권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나무를 숲에게서 떼어놓지는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인간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인간 본래의 존재가치는 떨어뜨리지 못한다. 두 작품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들은 자연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물과 나무, 돌, 나비 등과 같은 생태 속의 자연환경 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자연(自然)에 감동할 것을 말이다.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의 대부분의 연기가 익살스러워서 전통적인 광대극의 느낌을 주었지만 연출가의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주옥같은 대사들이 곳곳에 숨어있어서 연극을 묵직하게 빛내 주었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우리의 주변과 사람들을 바라보자.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따뜻한 관심을 갖고 대한다면 그것은 별이 되어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이다.


연분홍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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