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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서 사랑으로, 연극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8년 전에 씌어졌다. ‘폭풍의 언덕’은 본능적이고 야만적인 히스클리프와 오만하면서도 열정적인 캐서린의 불멸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니 일단은 로맨스물이라 할 수 있겠으나, 사랑하는 여자를 못 잊어 무덤을 파헤치는 히스클리프나 히스클리프를 두고도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캐서린이라는 ‘여지껏 문학사에서 볼 수 없었던 인물’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한 철학물이기도 하다. 요컨대 ‘폭풍의 언덕’은 그동안 인간의 역사가 외면해 왔던 인간 내면의 본성, 즉 추악함이나 이기심 혹은 애욕과 같은 질척한 것들에 집중했다는 데에 ‘고전’의 가치가 있다.

물론 이 소설이 해낸 것은 새로운 인간형의 제시 이상이다. 독특한 캐릭터, 시각적인 무대 배경 등 갖은 희곡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폭풍의 언덕’은 이후 영화, 연극, 무용 등의 원소스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초연된 연극 ‘폭풍의 언덕’이 9월 1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앵콜공연에 있다. 북적북적한 대학로 치고는 한산한 곳에 위치한 ‘대학로 예술마당’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 흡사 폭풍의 언덕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연극은 소설의 기본 스토리를 유지하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인물들의 관계가 워낙 복잡한 서사라는 점에서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강행한 셈이다. 선택한 것은 물론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고, 집중한 것은 그들의 악마적 본성과 열정적 사랑이다. 시간적 구성 또한 원작과는 달리했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원작과 달리 연극에서는 현재에서 과거, 과거에서 미래, 혹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시간이 변화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존재하는 시간은 언제나 현재 뿐이라지만, 히스클리프의 시간에는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가 현재 속에 함께 녹아있기 때문이다. 후회스러운 과거와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 그리고 고통스런 현재. 이것이 공존하는 시간적 구성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비극적인 사랑에 눈물 한 방울을 더 얹는다.

‘폭풍의 언덕’ 에 있어서만큼은 무대 배경이 서사의 한 줄기를 담당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관객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사실상의 공연은 시작된다. 극장 문을 들어서면 이른 새벽의 숲 속처럼 희뿌연 안개가 눈앞을 가린다. 가려진 시야에 신경을 쏟을라치면 매캐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30년 동안 한 번도 빛을 보지 않은 창고에서나 날 법한 냄새다. 안개로 인한 눈가림과 코를 찌르는 냄새는 황량한 들판위의 외딴 저택 ‘워더링하이츠’를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무대 위에 재현된 ‘워더링하이츠’는 오묘하고 섬세하다. 3대에 걸친 비극을 숨기고 있는 이곳은, 한 그루 큰 나무와 나무로 만들어진 흔들의자, 나무의 밑동인 그루터기로 묘사돼 있다. 나무 뒤로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이 깃들어진 언덕이 있는데, 이 언덕은 후에 캐서린이 묻히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눈치 챘듯이 무대는 나무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성의 상징인 나무, 그러나 무대 한 가운데 자리한 큰 나무는 무대 전체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가지로 형상화 돼있을 뿐 건강한 이미지는 없다.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 가장 가느다란 가지에는 가장 여린 잎이 있을 것이었다. 괴팍하고 잔인한 히스클리프와 명랑해 보이는 캐서린의 웃음 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그들의 영혼처럼.

무대는 히스클리프의 영역인 왼편과 캐서린의 영역인 오른편으로 나눠진다. 왼쪽에 있는 큰 흔들의자에는 히스클리프가 주로 앉고 오른쪽에 있는 그루터기에는 캐서린이 주로 앉는다. 안락함을 주는 흔들림이지만 벗어날 수 없는 구획을 반복할 뿐인 흔들의자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히스클리프와 닮았다. 잘려진 나무로 만들어진 그루터기 또한 잘려진 사랑으로 가슴 아팠을 캐서린의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왼편에는 또 하나 눈에 띄는 무대장치가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문이다. 주로 히스클리프가 드나드는 문이다. 캐서린은 오른쪽으로 난 문을 통해 등퇴장을 반복하기 때문에 이 문을 통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만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둘이 만날 때가 있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의 영혼을 볼 때다. 캐서린의 영혼을 발레를 통해 형상화한 것은 연극 ‘폭풍의 언덕’의 독특한 연출의 하나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히스클리프와 만나는 캐서린의 영혼은 빛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문을 통해 사라진다. 영혼과 안식, 기도와 사랑이 있는 곳 성당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살아생전 고통스러웠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이 죽어서 만큼은 완성될 것임을, 말하자면 불멸의 사랑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나무’에 대해 생각해본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상처를 상징하던 나무는 다음 세대인 헤이턴과 캐쉬에게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욕망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다만 욕망이 추구하는 것이 대상일 경우 그것은 파멸을 부를 것이고, 주체일 경우 사랑으로 승화할 것이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한때 서로를 대상으로 추구했다. 상대방의 결핍을 끌어안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려는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늦게 이뤄진 그들의 ‘사랑’은 곧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과거의 시간을 갖고 있는 저 밑동에서부터 미래를 가리키는 가지 끝까지, 상처 없는 잎이며 가지가 어디 있겠는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부러 가지치기도 하는데.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상처 많은 사랑은 가지치기를 거쳐 이제 헤이턴과 캐쉬의 사랑으로 뻗어갈 것이다.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글의 끝을 돕는다. ‘아!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박혜진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본 기사는 10월 6일자 기사를 재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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