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의 유서 같은 독이 뒷골목 귀퉁이마다 잔뜩 웅크려 있고, 영혼에 구멍을 뚫는 재즈의 농염한 냄새가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1920년대 ‘시카고’, 범죄자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살인의 엔터테인, 욕망, 돈, 부패와 폭력이 판을 치는 1920년대 시카고를 블랙 코미디로 노래한 브로드웨이 대작, 바로 뮤지컬 시카고이다.
법도 없는 도시에 법칙 없는 재즈처럼
‘빵!― 한 번 더 빵!― 록시가 내연 남 프레디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같은 무대, 관능 적인 몸짓의 벨마가 ‘All That Jazz’를 멋들어지게 부르고 있다.‘ 뮤지컬 시카고에는 극 중에 극이 있다. 벨마의 자극적인 음악과 춤이 관객의 감각을 마사지하는 동안 록시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한 컷의 씬 은 마치 앞으로의 행보를 짐작케 하는 드라마 예고편 같다. 이런 극중극 구조는 아무런 특수효과가 없는 현실의 무대를 가상의 영화만큼이나 흥미롭게 한다. 이처럼 뮤지컬과 영화의 동등비교가 가능케 한데에는 감추어진 조력자, 조명의 뒷바라지가 컸다. 초점 없는 어둠에 분사되는 조명, 약기운처럼 퍼지는 담배연기는 관객들을 1920년대 시카고 클럽으로 순간이동 시킨다. 새까만 배경, 새까만 의상, 온통 새까만 빛이 넘실되는 단조로운 무대에 다채롭게 쏘아 되는 조명줄기가 등대의 역할을 했다면, 무대의 절반을 차지하는 재즈 밴드는 보트에 달린 초강력 모터였다. 밴드가 무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니 어색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실제 클럽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음악의 현장성을 살리고 극에 사실성을 더해주었다. 게다가 밴드 사이 계단은 주인공들의 등퇴장을 노출시켜 세트의 사실감을 더했다.
재즈와 뮤지컬 시카고의 관계는 데칼코마니다. 예정된 행로 없이 불안하고 불연속 적이지만 계속해서 관객을 왕성하게, 숨 가쁘게, 숨 막히게 그러나 갈수록 섹시하게 빨아들인다. 재즈와 살인의 삼투압이 짜낸 농도 깊은 원액,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는 알짜배기, 그것이 바로 뮤지컬 시카고다!
또한 흥미로운 드라마 전개, 조명, 음악, 세트를 도움닫기로 뮤지컬 시카고를 시카고답게 만든 일등공신들은 바로 배우다. 시카고 최고의 변호사, ‘용의주도 미스터 빌리’. 그는 법정 승리를 위해 진실을 은폐, 왜곡 시키고, 자기 멋대로 언론은 조작하면서도 “내겐 오직 사랑뿐” 을 불러대는 인간이다. 남경주는 그 빌리의 캐릭터를 여과 없이 뽑아내주었다. 배우 배혜선은 청순한 이미지와 그 이면에 내면의 잠재된 욕망으로 들끓는 귀여운 악마 록시의 양면성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었다. 벨마역의 최정원은 뮤지컬의 본질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며 표현해내는 한 차원 높은 카리스마로 최고 수준의 전달력을 관객에게 이입 시켜주었다.
1920년대와 2008년이 뫼비우스띠 담론으로
1순위가 볼거리인 쇼라 하더라도 메시지의 진정성은 언급 되어야한다. 그럼에도 그 무엇도 진정성에 집중시키지는 말아야한다. 뮤지컬 시카고는 ‘탐욕과 거짓이 난무하던 1920년대 격동기의 시카고’라는 부조리와 모순의 총에 유머와 위트, 브로드웨이 쇼의 화려함을 장전시켜 마치 폭죽처럼 쏘아 올린다. 그 현란한 총성의 잔음은 해학적 메시지가 되어 영사기의 이미지처럼 뇌리에 남겨진다. 뮤지컬 시카고가 꼬집어낸 사회적 부조리들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선정적이고 통속적인 저널리즘, 형법 제도, 황금만능주의 등 교화나 상생보다 상벌과 포장을 중시하는 외형적 메타 이미지주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5000달러만 있으면 어떠한 사건이든 상관치 않고, 승소를 위해 진실을 왜곡시키고 언론을 조작하는 속물변호사 ‘빌리’는 무엇보다도 돈이 우선인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감옥에서도 돈의 힘은 통한다. 마마는 죄수들에게 돈을 받고 일을 처리해 준다. 시카고에서 보여진 황금만능주의는 현재도 역시 마찬가지다. 돈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지, 사람이 돈을 위해 존재 하는지, 그 뫼비우스띠같은 자본과 인본의 모순이 1920년대를 넘어 2000년대에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고귀한 희망들로 한때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는 단지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을 위한 강제 억압이 되어 버렸다.
빌리의 유창한 변론과 록시의 순진한 외모에 넘어가 급기야 그녀를 동정하고 무죄선고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록시에게 홀려 생기지도 않는 아기를 가졌다고 증언해준 의사의 단면은 황색 저널리즘과 자본주의의 배설물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언론은 가장 저속한 것들의 생존이라는 다윈의 원리에 의해 그 존재를 정당화 시키려는 것 같다.
시카코 뮤지컬은 1920년대의 시카코를 통해 지금의 ‘국가를 뛰어넘는 다국적 자본주의 제국화’, ‘자본의 대물림과 독식성’, ‘천박하고 선정적인 저널리즘’을 은유적이면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공연담론을 주도하고 있다, 2008년 9월에.
이정연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 김고운기자 vortexgo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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