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위대한 성취를 하거나 지속시키지 못해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콤 골드스타인Malcolm Goldstein
“요즘 무슨 공연 보면 좋겠냐고요? 감동이 필요하신 거죠? 뭐, 굳이 물어보시니 인심 써서 한 편 알려드리죠. 뮤지컬 「우리 동네」요! 강추입니다!”
최근에 본 작품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다들 보셨나요? 아직도 안 보셨다고요? 정말 왜 그러시는 거죠? 그럼 그건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놓치고 엄청 불쌍하게 마이너스로 사시는 겁니다. 공연 끝나기 전에 어서 꼭 보셨으면 해요. 공연은 8월 31일까지 합니다. 절대 후회 없는 선택이 되실 거예요. 아마 보고 나시면 이 공연을 추천해준 저에게 고마워하실 거라고요.
저는 이 공연을 보다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소중함을 모른 채 되는 대로 막 살아버린 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죠. 그런데 눈물을 흘리고 나면 착한 마음이 생기고 착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삶의 의욕이 새로 솟아나고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앗! 어쩌면 저도 분명 따뜻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 같아요. 제 안에도 그렇게 따뜻한 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요! 근데 왜 평소에는 까칠하고 극단적이고 직선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사람들이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거 같아요. 하하하.
손톱만큼도 색다르거나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네 인생 이야기이지요!
우선, 무대를 보고는 좀 놀랍니다. 곧 공연이 이루어질 무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대장치도 안 되어 있고 소품도 없이 텅 비어 있었으니까요. ??? 머릿속에 물음표가 잔뜩 그려졌습니다.
곧 그 무대 위로 배우 같아 보이지 않는 남자(김도신)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대감독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가 진짜 그 공연을 준비한 무대감독인 줄 알았습니다. 공연 전에 들려주는 관람 예절을 얘기하나보다 했죠. 그거 있잖아요. 핸드폰 끄고 사진촬영 안 되고 뭐 그런 블라 블라 블라bla bla bla.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고요. 벌써 공연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뮤지컬 속 무대감독 배역을 맡은 배우였어요. 그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이해하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장소, 인물, 시간을 총체적으로 소개해주었답니다. 관객들은 무대감독이 하는 말을 따라 부리나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무대를 꾸며야 합니다. 무대감독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의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미래까지도 알려주고 극 속에서 다른 역할로 출연도 합니다. 배우들보고 연기를 하라고도 하고 그만하라고도 합니다. 정말 바쁜 분이지요.
이런 식인 거죠. 그러니까 무대감독을 통해서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란 바로 이렇다고요. “여러분, 뮤지컬 보러 오셨죠? 자, 이건 뮤지컬입니다. 잊지 마세요. 지금 이건 허구인 뮤지컬이라고요.”
제가 지금껏 보아왔던 연극이나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 거죠. 배우들은 텅 빈 무대 위에서 마치 다 있는 것처럼 마임을 통해 연기를 했고요. 관객들은 배우들의 마임을 보면서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했죠. 그건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엄청 우스워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염려는 붙들어 매세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탄탄한 연기력을 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자, 그럼 이제 이름 모를 들꽃처럼 순박하고 서정시처럼 아름답고 가슴속에 오래 남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주는 이 작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선, 작가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군요. 워낙 미국 문학사와 현대연극사에 손꼽히는 거장이니까요. 손톤 와일더Thornton Niven Wilder는 퓰리처상을 소설로 1번 희곡으로 2번 해서 도합 3번이나 수상했습니다. 소설과 희곡 모두에서 성공한 유일한 작가이죠.
그는 1897년 미국 위스콘신 주 메디슨에서 신문사 사장인 아버지와 장로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중국 영사로 임명되는 바람에 초등교육을 홍콩과 상해 등지에서 받았습니다. 이후 오버린대학과 예일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소설과 희곡을 쓰기 시작했죠. 대학 졸업 후 로마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기도 했고요. 또 한때 고등학교 교사로도 일했답니다.
그에게 작가로서 명성을 가져다준 첫 번째 작품은 1926년에 발표한 『카발라The Cabala』입니다. 이어 1927년에 발표한 철학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The Bridge of San Luis Rey』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1930년부터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희곡과 고전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예일대학 다닐 때 썼던 희곡 『트럼펫 연주The Trumpet Shall Sound』가 한 실험 극장에서 상영된 걸 계기로 희곡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38년 희곡 『우리 동네』로 다시 한 번 더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차츰 소설보다는 희곡창작에 더 몰두했습니다. 그 이유는 연극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그 가치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장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연극은 가장 위대한 예술 형태이다”고 말했죠.
1942년 희곡 『위기일발The Skin of Our Teeth』로 세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뭐, 그는 상복을 타고났나 봐요. 다작을 한 작가도 아니면서 퓰리처상을 3번이나 받았으니까요.

살기 위하여 삶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기 위하여 살라
『우리 동네』는 1938년 1월 22일 토요일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에 위치한 맥카터 극장에서 제드 해리스Jed Harris 연출로 초연된 이래 ‘매일 밤 미국의 어느 곳에선가 공연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 연극반의 단골 레퍼토리이죠.
원작에서는 1900년대 인구 2,642명밖에 안 되는 뉴햄프셔 주의 그로버스 코너스Grover’s Corners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로버스 코너스는 지구의 한 모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우리나라 김성수 연출의 시즌6 뮤지컬 공연에서는 배경이 1980년대 경기도 파주로 바뀌었습니다. 원작보다 서정성과 낭만성이 더 가미돼 있고요.
줄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총 3막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막의 제목은 “일상생활”입니다. 1982년 5월 7일. 경기도 파주의 한 동네가 배경입니다. 새벽에 그 동네 어느 집에선가 막 쌍둥이가 태어났고요. 도심에서 벗어난 작은 동네를 배경으로 해서 의사인 김 박사(박중근) 집안과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 선생(홍서준) 집안을 중심으로 하루 동안 일어나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뭐 특별한 것도 눈에 띌 만한 사건도 없습니다. 단번에 시선을 모으는 개성적인 인물도 파란만장한 인생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인물들과 단조로운 인생입니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 세상 모든 어머니들, 세상 모든 아들들, 세상 모든 딸들의 모습이 담담하고 심심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2막의 제목은 “사랑과 결혼”입니다. 4년이 흐른 1986년 6월 20일.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사람살이 별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김 박사 아들 상우(이상곤)와 이 선생 딸 선영(오산하)의 결혼식 날입니다.
무대 뒤에서 신랑과 신부가 입장을 하면서 관객들은 모두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이 됩니다. 무대감독은 그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에 이르게 됐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지요. 무대 위에서 종종 과거와 미래는 그런 식으로 현재로 통합됩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상우와 선영은 곧 세상의 모든 소년들이 그렇듯 세상의 모든 소녀들이 그렇듯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근데 그 사랑이 달콤하고 낭만적이고 간지럽지 않습니다. 팥빙수를 먹으면서 상우가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 뒤 바로 더 이상의 자세한 묘사나 설명 없이 결혼식 장면으로 옮겨가죠.
3막의 제목은 “죽음”입니다. 다시 9년의 시간이 흐른 1995년 5월.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 공동묘지입니다. 선영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영이 둘째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만 거죠.
선영은 무대감독에게 부탁해서 다시 산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열세 살 생일날인 1979년 12월 12일 수요일. 그녀는 그곳에 갔다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걸 보고는 괴로워하며 다시 무덤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선영은 무대감독에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까요? 자기들이 살고 있는 1분 1초를 말이에요.”
무대감독은 아주 소수의 종교인과 예술가들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사는 동안에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우리 인간은 슬프게도 죽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마는 거지요.
1막, 2막, 3막을 통해 우리는 한 소년과 소녀가 자라서 성장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일을 하고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아무런 꾸밈없이 단조롭게 담아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영원불변하는 우주적인 진리를 깨닫게 되죠.
이 작품은 1막의 새벽, 봄, 탄생에서 한 시작은 성장하고 자라고 결국은 3막 끝의 밤, 겨울, 죽음으로 마칩니다. 그렇게 생명의 한 사이클이 조용히 완성되죠. 그 순환과정 중에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들이 채워져 있고요. 근데 말입니다. 삶이란 결국 그 무수히 반복되는 소중한 일상들의 총합인 거잖아요. 그걸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손톤 와일더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조차 어떤 가치를 발견해보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아마 이 공연을 보고 나면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한 채 마치 장님처럼 살아왔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겁니다. 그리고 삶의 사소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위대한 가치들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요. 꼭 감고 있던 눈을 뜬 것만 같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보이고 인생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그러고 나면 저절로 삶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꼭 시간 내서 보시기를 강력히 권하는 공연입니다.
ps 남자들에게 고함! 공연 보러 가면 관객의 8이 여자이고 2가 남자입니다. 뮤지컬 「우리 동네」에도 여자 관객들이 월등히 많았고요. 공연 중간에 선영 엄마 역을 맡은 배우가 나와서 구구구구 그런 후렴이 있는 노래를 부르면서 닭들에게 모이를 주듯 관객들에게 사탕을 나눠줘요. 그러면서 한마디 한답니다. “에휴, 여자들끼리만 왔구나. 다음번에는 남자 만들어서 데리고 와.”여자 관객들은 그 말을 듣고 민망해서 웃음을 짓지만 다시 한 번 휑하고 쓸쓸한 마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숙인답니다. 정말 좌석에 죄다 여자들만 주르륵 앉아 있습니다. 다들 예쁘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남자 여러분, 공연장 가면 정말 멋진 여자들 많답니다. 길거리에서 외롭다고 방황하지 말고 공연장에 가보세요. 공연도 보고 여친도 만들고! 뭐, 이런 게 바로 일석이조죠.
제작 : 이순규, 창조콘서트홀
원작 : 손톤 와일더
연출 : 김성수
번안각색 : 김성수
작곡 : 강규영
출연 : 김도신, 홍서준, 이지수, 박상현, 신금숙, 김수정, 홍관표, 김태연, 나정숙, 남궁희, 오산하, 김병혜, 명민영, 리치, 이상곤, 김은진, 최은석, 박중근
안현주 bread-wi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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