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은 ‘이야기’ 이다. 동시에 ‘이미지’ 이다. 극장과 무대는 작품이 반영하는 현실적인 세계이며 그것을 형상화하는 이미지들의 향연이다. 그 세계가 관객에게 제시되는 모양은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임과 동시에 매우 시각적이고 은유적인 대상들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한 상징과 은유들을 푸는 작업은 흥미롭다. 연극 ‘패왕가행’ 이 선사하는 시각적 이미지들은 가히 압도적이며, 이것은 패왕 ‘항우’가 들려주는 1인칭의 이야기 형식과 함께 극에 대한 몰입을 극대화시킨다.
무대는 특별한 세트 없이 비어있다. 다만 바닥까지 수직으로 매달린 직사각형 종이들이 후면을 메우고 있다. 어두운 무대의 정면에는 톱 라이트를 받는 투명한 7개의 사각 어항이 일렬횡대로 늘어서있다. 그 안에는 투구, 말머리, 검, 갑옷 등 극의 진행에 쓰일 소도구들이 관객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극의 시작부터 강한 자극을 주는 톱 조명을 통한 소도구들의 부각은 앞으로의 이야기 진행에 대한 실마리를 주며 각각의 소도구들이 주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 해석하도록 강요한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패왕 항우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항우의 내면을 보여주는 이 연극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되며 항우가 현실과 자신의 내면을 오가면서 왜곡되어 온 진실에 대하여 털어 놓는다. 이러한 메시지의 전달양식은 관객을 쉽게 극에 몰입하도록 한다. 실제로 항우는 관객과의 거리를 최소한으로 만들며 무대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설움을 토로한다. 위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우미인’이다. 불안정하며 다혈질인 항우와는 달리 그녀는 부드럽고 침착하다. 연극 ‘패왕가행’은 이러한 상반된 인물의 이미지를 멀티미디어 영상을 통해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다. 항우가 부각되는 장면에서는 붉은색의 무수한 타원형의 도형들이 불규칙적으로 일그러지고 회전하며 그의 불안정함을 드러낸다. 반면 우미인은 잔잔한 푸른색 물결로 상징되어 무대 후면에 투사되며 물과 불, 안정과 불안정, 정과 동의 대립된 이미지의 구축을 통해 인물에 대한 몰입을 배가시킨다.
‘인간’ 항우와 연관된 죽음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항우는 그들의 죽음을 원하지 않지만 결과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붉은 색이 점차 연극 전반을 지배하는 색으로 기능한다. 후면 배경을 이루는 직사각형의 종이들이 하나 둘씩 피로 물들면서 죽어간 이들을 애도한다. 종이벽의 최상부에서 터진 붉은색 염료는 중력에 의해 천천히 길고 긴 꼬리를 그리며 항우의 양심과 관객의 감성에 강렬한 자극을 남긴다.
‘눈’의 쾌락이 최고조에 이르는 부분은 항우를 위로하기 위해 검무를 추던 우미인의 급작스런 자결 장면이다. 우미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형상을 취하며, 오열하는 항우에게 허공에 들린 채 안겨있다. 무대 중앙에 집중적으로 비춰지는 높은 조도의 키 라이트가 시선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붉은 색 꽃잎들이 그들을 위로하듯 덮어버린다. 이렇듯 연극 ‘패왕가행’은 색과 조명, 영상, 극적인 연출에 정력을 쏟으며 극이 가진 서사적 힘에 의존하기 보다는 그것을 재료로 하여 최상의 시각적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다. 역사적 위인 또는 유명인을 주인공 삼아 그들의 인간적 면모에 초점을 맞추는 서사는 이제 진부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 성패는 관객들의 ‘인물’에 대한 몰입과 공감에 달려 있으며, 연극 ‘패왕가행’은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생소한 항우라는 인물을 소재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했다. 그 일등공신은 객석을 가득 메운 시선들을 위해 만찬을 정성스럽게 준비한 연출가 및 디자이너들임이 분명하다. 현대 중국 연극계의 저력을 여실히 보여준 중국 국가화극원, 그들이 들고 찾아올 앞으로의 성찬이 기대된다.
이정완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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