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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유서’는 쓰레기 매립지 위에서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곳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가 없다. 편지 한 장 받아볼 수 있는 주소가 없고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 없다. 지번이 없다는 것은 세상 밖에 존재한다는 뜻이고, 기대되는 내일이 없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얘기다. 모든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는 법, 두 가지를 못 가진 이곳 사람들은 이제 주소와 희망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무려 4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대서사극의 출발이다.
긴 러닝타임이나 쓰레기 산을 재현한 방대한 규모의 무대 외에도 ‘원전유서’는 할 말이 많은 작품이다. 눈앞에 있던 산이 순식간에 없어지는 탁월한 무대 연출력은 ‘옷’에 불과하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옷’도 좋았지만 희곡 자체가 워낙 명품 몸이었기 때문이다. ‘원전유서’는 작가의 우주적인 사유가 등장인물들의 시적 언어로 표현된 작품이다. 삶을 대하는 작가의 깊고 넓은 사유, 독특한 등장인물, 한 페이지가 넘는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도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귀가 황홀해지는 대사, 이 세 가지야 말로 ‘원전유서’의 미덕이다.
‘원전유서’는 소재나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다. 방대한 규모를 가졌지만 소재는 결국 ‘가난과 폭력’이고 플롯도 비교적 단촐하다. 그러니 4시간을 이끌어가는 서사의 힘은 소재도 아니고 플롯도 아니다. 바로 인물이다. 이야기는 혼돈과 파괴의 세상 한 귀퉁이에서 혁명을 꿈꾸는 ‘남전’과 텃밭을 일구는 ‘어진네’ 두 축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다른 삶에 관심이 없다. 그냥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외부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신의 논리로 무장한 등장인물들은 ‘원전유서’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남전’과 ‘어진네’ 뿐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 고집이 보통을 넘는다. ‘어진네’는 남편이 귀신에 홀려 동네에서 가장 폭력적인 ‘우출’과 함께 산다. 혼자 맞는 것도 아니고 자식들도 함께 맞고 사니 어떻게든 ‘우출’에게서 벗어날 만도 하건만 그냥 맞거나 몸이 따라주면 도망치는 것이 전부다. 제 자식을 때려죽인 인간에게 물 가져 오라면 물 가져가고 밥 내오라면 밥 내가는 게 이 사람이다. 무서울 만큼 저항하지 않는데, 이게 오히려 ‘어진네’가 저항하는 방식이다. 죽도록 두들겨 맞고도 집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어진네’를 보고 진저리치며 집을 나간건 결국 우출이었으니, 굳이 승패를 나눈다면 ‘어진네’가 승자인 셈이다.
‘남전’의 논리는 우직한 ‘어진네’ 에 비하면 날카롭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그의 날선 의지는 세상의 벽만 실감할 뿐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쓰레기 산을 토지로 인정해 달라는 그의 논리는 실상 괴변에 지나지 않는다. ‘토지국장’ 말마따나 그런 식의 논리라면 세상에 토지 아닌 땅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전’의 논리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세상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살고 있는 자의 말이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생존의 논리 말이다. 물론 그가 원하던 세상은 오지 않는다. 만만찮은 세상 아닌가. ‘남전’은 제도권에 의해 매정하게 이용당하고 물질에 눈먼 사람들의 추한 몰골만 확인한다.
무대 위의 조명은 ‘어진네’와 ‘남전’을 주로 비추지만 주변 인물들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 않다. 종을 뒤집어서 밥통이라고 메고 다니는 떡국도사나 줄기차게 맞으면서도 줄기차기 공부하는 ‘어진네’의 아들 ‘어동이’, 사람까지 죽여 놓고도 뻔뻔하게 ‘어진네’를 부려먹는 천하에 몹쓸 ‘우출이’, 쓰레기 산에 사는 사람들은 쓰레기 산 사람대로 살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어진네’의 시아비까지, 누구 하나 가볍게 설정된 인물이 없다. 더욱이 누구 하나 생각의 변화를 보이는 사람도 없다. 조금 더 눈여겨보면 ‘원전유서’에는 인물들 간 관계의 변화도 없다는 것이 보인다. 폭력을 행하는 사람은 계속 폭력을 가하고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줄기차게 폭력을 당한다. 누군가를 애써 설득하려 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 설득되는 사람도 없다. 이 고집스러움은 ‘원전유서’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는 곳, 세상 중심부에서 가장 멀고 하늘과는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밖에 있는 것에 흔들리지 않을 논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통용되지 않는 개똥철학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인물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다루는 이 작품은 희망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삶도 부정하지 않는 것은 ‘원전유서’가 가치 있는 이유임에 분명하다. ‘남전’이 그토록 토지화 시키고 싶어 했던 쓰레기 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어진네’의 모래 텃밭에도 상추가 자란다. 다른 데도 아니고 쓰레기 산에서 자란 나무와 모래밭에서 자란 상추다. 그래, 이 정도 희망이면 인생 살만한 거 아닌가. ‘원전유서’가 말하는 희망은 딱 이 정도다.
논쟁의 빈도는 덜어낼 것도 덧붙일 것도 없어서 좋다. 논쟁으로 끌어가는 희곡은 신뢰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원전유서’는 ‘남전’과 몇몇 주장 강한 사람들의 논쟁이 볼만한 연극이지만 논쟁으로 극을 진행시키지는 않는다. 인물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드러나야 할 지점에서만 적절하게 사용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는 ‘원전유서’를 빛나게 하는 또 하나의 장치다. 치닫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눈물바다를 만들 수 있을 법한데도, 등장인물은 감정의 과잉을 경계했다. 발가벗겨 쫓겨나도 ‘난 괜찮아요’ 한마디로 끝, 죽은 딸을 하늘로 보내면서도 ‘오고 싶으면 아무 때나 오거라. 안 오고 싶으면 안 와도 엄마는 괜찮다’ 정도가 전부다. ‘어진네’는 먼저 눈물 흘리는 법이 없다. 간간이 눈물을 훔치는 건 관객들뿐이었다.
지번이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원전유서’에는 세 가지 미(美)가 있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대화에는 골계미가 있고, 고지곧대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삶에는 비장미가 있다. 그리고 뼈 밖에 남지 않은 삶들을 이토록 깊이 우려낸 극작가 김지훈에게는 숭고미가 있다.
박혜진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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