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이 연극을 관람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리고 밤새 말입니다. 잠도 못 자고 뒤척이면서 한숨 푹푹 쉬고 기분도 한껏 우울했더랍니다. 삶에 대한 의욕 상실. 뭐, 몸이 자꾸만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죠.
친한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기까지 했고요. 과연 그들도 그럴까? 연극에서 그려진 것처럼. 하긴 제 자신조차도 진실만을 이야기할지 믿을 수 없어지더군요.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더 이상한 기분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이지 그렇게도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믿을 수 없단 말인가요? 허위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진실을 안다는 것은 그다지도 어렵고 불가능하단 말인가요?
인간에게는 영혼이 없다…… 인간은 기근, 화재, 전란보다 더 사악하다
연극 「나생문羅生門」은 일본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가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쓴 「덤불 속에서」(1922년)를 큰 줄거리로 한 뒤 「나생문」(1915년)을 섞어서 만든 영화를 다시 연극 무대로 올린 작품입니다.
영화는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195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영화의 우수성을 서구에 알린 작품으로 유명하죠. 근데 영화가 자국에서 처음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건 아니랍니다. 1950년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 시사회장에서 제작자가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라고 일갈하고 자리를 뜬 건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죠.
참, 그러고 보니 나생문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영화가 성공하고 나서 그 질문은 항상 따라붙었습니다. 혹시 무슨 철학적 의미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작품은 관객에게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잖아요. 그러니 정말이지 그에 딱 걸맞은 관객 측의 질문이었죠.
이에 대해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는 자서전에서 “특정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삶의 반영일 뿐이다”라는 대답을 했답니다. 원래 나생문은 헤이안 시대의 수도 헤이안경의 주작대로 남단에 설치된 문을 말합니다. 980년 폭풍우로 파괴된 후 황폐하게 남아 여러 기이한 이야기들을 낳고 도적의 소굴이 되기도 한 곳이고요.
연극 「나생문」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원작보다는 구로자와 아키라가 새롭게 각색한 내용을 더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이 바로 이 연극의 소설 원작자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며 제정된 상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막연한 불안’이라는 유서를 쓰고 자살한 작가로 유명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는 생후 8개월 때 어머니가 정신병에 걸리는 바람에 외삼촌 집에서 자라게 됩니다. 아쿠타가와라는 성은 어머니 가문의 성이지요. 그는 자신도 어머니처럼 정신병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미친 여자의 아들이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건 두고두고 그의 트라우마가 됩니다.
설상가상 그는 양부모와 이모의 반대로 첫사랑 요시다 야요이와의 결혼이 깨지면서 사랑으로 위장된 에고이즘을 증오하게 됩니다. 단, 여기서 그가 증오한 에고이즘은 생존하기 위해 갖는 본능적이고 추악한 에고이즘이 아니라 ‘에고이즘이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겉포장 안에 감추어진 에고이즘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고통을 주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연극 「나생문」은 1976년 세실극장에서 김학천 연출로 초연된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각 한 번씩 재공연을 했습니다. 이후 극단 수에서 구태환 연출로 2003년, 2005년, 2006년, 2008년 공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 그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비가 내리는 여름, 다 쓰러져 가는 나생문(성문)에 스님과 나무꾼이 앉아 있습니다. 그곳에 비를 피하러 가발장수가 찾아듭니다. 그 세 사람은 곧 낮에 있었던 다소 기이했던 재판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죠. 가발장수는 죽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파는 악당이죠. 그에 따르면 시체의 머리를 뽑는 일은 생존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는 스님과 나무꾼에게 질문하고 부추기고 조롱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도록 유도해내는 역할을 한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무사가 칼에 찔려 죽었다.
-무사의 아내가 산적 다조마루에게 겁탈을 당했다.
-값비싼 칼 한 자루가 사라졌다.
그 외에는 진실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산적, 무사의 아내, 죽은 무사의 혼령의 진술은 다 다릅니다. 하지만 누구 말이 맞고 누구 말이 틀렸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들 너무나 그럴듯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산적은 이미 너무나 많은 악행을 저지른 뒤에 잡힌 터라 무조건 사형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차피 사형당할 운명이니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진실만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가 무사를 죽였다고 합니다.
무사의 아내는 자신이 남편인 무사를 죽였다고 합니다. 산적에게 겁탈을 당한 후 남편이 자신에게 모멸에 찬 눈빛을 보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는 부분을 약간 모호하게 진술하기는 합니다. 혼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남편이 죽어 있었는데 자신이 죽인 게 분명하다는 식이지요. 그리고 동정을 바라는 눈물을 흘리고요.
한편 무당을 통해 불려온 죽은 무사의 혼령은 자기 스스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산적에게 자신을 죽이라는 말을 하는 걸 듣고 배신감을 느꼈고 그래서 산적이 자신을 풀어주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 극에 달해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가 안 죽였다고 해야 할 상황에서 서로가 죽였다고 하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더욱이 그 세 명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산적은 죽음을 앞두고 하는 이야기이기에 진실이 아닐 수 없고, 무사의 아내는 저렇게 눈물을 흘리며 애절하게 이야기하고 있기에 진실이 아닐 수 없고, 죽은 무사의 혼령은 죽은 자가 하는 이야기이기에 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 다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정말 엄청 헛갈리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말도 생겨났답니다.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 한 사건에 대해 등장인물이 각자의 주관적 입장과 기억에 따라 서로 엇갈리는 이야기를 해나가는 걸 말합니다. 문제는 그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다 개연성이 있고 나름대로 설득력이 갖는다는 점이지요.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해내기가 어려워지고 맙니다.
관객들은 워낙 그들의 진술이 엇갈리다 보니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지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집중력을 발휘해가며 공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 에고이즘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
인간은 ‘진실과 대면할 시간’ 즉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마지막 순간에서조차도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나 봅니다. 진실을 멋대로 삭제, 왜곡, 가감해서 새롭게 각색해 버리니까요. 상대가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든 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대나무 숲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과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비가 내리는 동안 다 허물어져 가는 성문에 모여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입니다.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의 인간 행동은 아니라는 거지요.
루시퍼 이펙트Luciffer effect란 말이 있습니다. 상황과 시스템에 따라 착하고 평범한 인간이 순식간에 악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걸 말하지요. 햇빛이 잘 비쳐들지 못하는 덤불 숲속이란 특수한 상황은 루시퍼 이펙트가 적용되기에 충분합니다.
대나무 숲은 인간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무법천지의 공간입니다. 산적 다조마루는 인간이기보다는 짐승에 더 가깝습니다. 졸리면 자고 배가 고프면 먹고 여자랑 자고 싶으면 신분이나 노소를 가리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고요. 남편 앞에서 아내를 겁탈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잔인하기 그지없는 행동입니다. 또한 그는 무사의 아내에게도 구애를 했다가 그녀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흥미를 잃어버리는 다소 즉흥적인 인물입니다. 그렇게 그는 갖은 악행을 저질렀으면서도 결코 죄를 뉘우칠 줄 모르고요. 하지만 이 연극 안에서는 그가 다소 가장 멋진 인물처럼 미화된 느낌입니다.
무사는 사회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으며 사회적인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지요. 성에서 살 때는 착하고 대범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존경받는 인물이지요. 만약 덤불 숲속에 있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숲속에 들어가는 순간, 산적의 유혹에 넘어가 훔친 칼들을 싼값에 사려고 하고 강간당한 아내에게는 스스로 자결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산적과의 결투에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비겁하고 졸렬한 인간이지요. 뭐, 산적이나 무사나 숲속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사의 아내는 일면 산적에게 강간당하고 남편에게 멸시당하는 가장 불쌍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상 산적과 남편인 무사를 부추겨서 싸우게 하고 결국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게 만든다는 점에서 팜므 파탈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두 남자 중 한 명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어찌됐든 그녀는 남편을 죽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관객들은 산적 다조마루, 무사의 아내, 죽은 무사의 혼령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완전 안개 속 상황에 처합니다. 비교적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나무꾼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나서야 어렴풋이 전체적인 윤곽을 잡기는 하지만 그의 이야기도 100퍼센트 진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고요. 그는 값비싼 칼을 훔쳤기에 모든 사실을 목격했으면서도 진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장 진실에 접근한다고 여겨지는 나무꾼의 진술을 기준으로 나머지 3명의 진술을 비교해보는 것을 택했습니다. 나무꾼은 손등이 거북이처럼 두꺼울 정도로 일평생 일을 한 사람이고 여섯 아이들을 키우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는 훔친 칼을 팔아 여섯 아이들을 키우는 데 쓸 생각합니다. 그는 가장 공정한 제3자의 입장에 서 있으며 나름대로 불의에 분노하기도 하니 그의 진술은 어느 정도 진실일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앞에서 그렇게도 멋지게 자기 미화와 합리화를 했던 세 명의 졸렬함과 비열함이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되고요.
폐허가 된 나생문에서 발견한 새 생명과 다시 회복한 인간에 대한 희망
4명의 진술을 다 듣고 난 뒤 우리의 마음은 참 쓸쓸해집니다. 그렇게도 인간이란 존재는 비열하고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 최후의 일격이 더 남아 있습니다.
나생문에서 버려진 갓난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근데 가발장수가 그 갓난아이를 싸고 있던 담요를 훔쳐가는 거지요. 이제 정말 더 이상 인간이란 존재는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확고히 서는 순간입니다. 그건 원작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의도한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이고 절망적인 결말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마지막 메시지가 남아 있으니까요. 마지막 결말 부분은 원작과 전혀 다르게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가 새롭게 넣은 겁니다.
마치 이 작품은 판도라의 상자 같습니다. 연극이 시작되면서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온갖 재앙과 질병을 얻게 된 이기적이고 회의적이고 비관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아 있던 희망처럼 이 연극에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나무꾼은 비록 비싼 칼을 훔쳐서 진실을 은폐했다는 도덕적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버려진 갓난아이를 외면하지 않고 가난한 상황에서도 데려다 키우겠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바로 그 나무꾼처럼 나약하고 결점 많고 이익에 눈이 멀어 비싼 칼을 훔치기도 하지만 인간이기에 버려진 아이를 동정하고 데려가 키우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그 앞의 너무나도 비열하고 사악한 인간들을 목격했기에 그 대목을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만 보기 힘들었습니다. 비록 당장은 아이를 기른다고 하지만 또 언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미리 앞서서 부정적인 일들을 예측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다시 한 번 인간에 대해 믿고 싶어졌습니다.
그래도 저를 포함해 우리는 모두 인간이잖아요. 이 작품은 돋보기로 햇볕을 모으듯 인간의 에고이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에고이즘을 극대화해서 그려 보이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 에고이즘이 전체 인간 모두에게 일반화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세상에는 서로 다른 얼굴만큼이나 너무나 많은 예외와 다양한 인간들이 살고 있으니까요. 다만 이 작품은 그런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극단적으로 부각시켜 보여줌으로써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인간에게는 분명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또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 하나의 사건이 얼마나 다양한 해석을 가져올 수 있는지도 알려주고요.
연극 무대는 대나무 숲으로 장식돼 한껏 일본풍의 미학을 전달하는 데 주력한 느낌입니다. 또한 음향효과에서 하이쿠처럼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타악기만을 사용하고 있고요. 타악기는 진실을 감추고 있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내면과 긴박한 사건 전개를 시적이면서 밀도 있게 표현해냈습니다. 무당이 죽은 무사의 혼령을 불러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요.
전체적으로는 산적 다조마루(김대건)가 의외로 멋지게 그려졌고 무사(데니안)는 영화에서보다 더 희화화돼 있었습니다. 지배계급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려는 연출자의 의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무사의 아내(양보람)는 팔색조처럼 각각의 이야기에서 성격이 확확 바뀝니다. 마치 전혀 다른 세 명의 여자가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죠. 그 세 가지 색깔을 연기로 잘 그려냈습니다.
극 전체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스님(최용민), 나무꾼(이승호), 가발장수(서현철)은 관객들을 끌어당기는 내공 있는 안정적인 연기로 극을 팽팽하게 이끌어 나갔습니다.
ps.
“인간은 그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윤색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 작품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이기주의는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죄악이다.”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가 영화 「나생문」을 설명하면서 한 말입니다. 근데 당신은 인간은 정말 그렇다고만 생각하시지는 않죠?
제작 : 극단 수
연출 : 구태환
출연진 : 이승호, 최용민, 서현철, 이건명, 데니안, 이요성, 김대건, 황세원, 서지원, 이서림, 양보람, 김성철, 유우재, 박정길
안현주 bread-wi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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