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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생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특성과 사랑의 과정 그 자체의 강박적 특성을 하나하나 이해하기란 매우 힘들다. 어린 시절을 되짚어보며 그 흔적을 찾아 이해하는 길밖에는 없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연극은 이 세상 최고의 자기 계발과 동기부여 참고서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게 하고 더 나아가 통찰력도 키워주죠. 혹시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시나요? 공감 능력이 부족하신가요? 그렇다면 연극만한 인생 교과서가 없답니다. 우리는 라이브 연극 무대에서 보는 배우들의 생생한 감정 연기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폭넓게 이해하게 하고 공감 능력도 키울 수 있답니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거지요.
연극열전2의 네 번째 작품 「블랙버드」는 1시간 4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굉장히 잘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그냥 그 공연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는 표현이 딱 맞겠습니다. 참나,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았어요. 2인극으로 우나(추상미)와 레이(최정우)만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완전 초긴장 몰입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손에서 땀이 쩔쩔 났습니다. 지루함의 ‘지’자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공연 내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경이 곤두서고 온몸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돋았고 정신적으론 희열을 느꼈고요.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우와~! 저렇게 인간의 세밀한 감정과 내면의 상처를 제대로 표현해내는 배우들이 있다니, 저렇게 실험적이고 인간의 밑바닥까지 탐구하는 깊이 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있다니, 저렇게 완성도 높게 작품을 만든 연출자와 스태프가 있다니 하고 감탄하고 놀랐습니다. 흔들리는 눈빛, 동공의 확대, 파르르 떠는 입술, 긴장해서 나는 식은땀, 감정 결에 따라 달라지는 목소리 톤 등 아주 세밀한 감정의 선들이 늘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곤두 서 다 표현됐습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조율된 악기가 세밀하게 정확하게 음을 내는 것 같았습니다. 대사빨도 끝내줬고요.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드라마 작가 김수현 말고도 저렇게 막힘없는 호흡이 끊어지지 않는 대사를 써내고 만들어내다니요. 추상미의 딕션은 예술이었습니다. 졸졸졸 정확하면서도 막힘없이 언어의 시냇물이 흘러갔죠. 그리고 그런 감탄과 놀라움은 약간 삼천포로 빠져 “나도 정말 인생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했습니다(이 세상에 그렇게 멋진 치열한 사람들이 있는데 저 역시 분발해야 하는 게 맞잖아요). 하하하. 좀 너무 비약해버린 생뚱맞은 생각이긴 하지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 진실을 캐보자고! 분명 그런 사랑을 한 이유가 있을 거야! 12세 소녀와 40세 중년 남자는 사랑을 한 걸까요? 그저 욕망에 충실했던 건가요? 열두 살밖에 안 된 판단력도 많이 부족하고 자아도 미성숙한 소녀 우나는 마흔 살의 남자 레이를 만나 3개월간 연애를 했고 섹스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누구라도 그 얘기를 들으면 충격부터 받을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나는 어린 맘이긴 하지만 그 관계를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 따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재판을 받고 헤어져 15년을 살았습니다. 15년이 지난 어느 날, 우나는 그 남자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너무나 궁금했으니까요.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동안 그녀의 인생이 그 일로 만신창이가 돼버렸지만요. 그 남자가 진짜 사랑을 한 건지? 아니면 욕망에 충실했던 건지요?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동안 여자 관객들은 우나에게 자기 동일시를 했고 남자 관객들은 레이에게 자기 동일시를 했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여자는 우나 같고 남자는 레이 같으니까요.
자, 저는 일단 우나의 그 모험에 박수부터 보낼게요. 버스를 잘못 탔으면 잘못 탄 곳까지 다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인생이란 너무 늦은 때란 없어요. 언제든 다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게 낫습니다.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한 데에는 내 안에 그런 선택을 하게끔 한 무언가가 있는 거고요. 용기를 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캐는 건 공포가 아닙니다. 공포는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용기를 내서 진실을 알아내고 나면 그 상처들을 이해하게 되고 치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쓰레기처럼 버림받았다는 것, 그 트라우마 인정하기! 레이는 15년 만에 찾아온 우나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녀의 등장으로 그의 안정된 인생이 망가질까봐 전전긍긍해 하지요. 직장 동료나 이웃들이 과거를 알면 안 되니까요. 더군다나 우나는 더 이상 어린 소녀도 아닙니다. 머리 색깔도 얼굴도 다 바뀌었고 키도 훌쩍 컸지요. 그녀가 그녀인지조차도 의심스럽습니다. 열두 살 소녀는 스물일곱 살 처녀가 됐으니까요. 레이는 이름도 피터로 바꾸었고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안정된 직장도 얻었습니다. 완전 딴 사람으로 살고 있죠. 그런 레이에게 우나의 방문은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우나는 다짜고짜 휴게실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넘치는 것을 가지고 잔소리를 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과 한판 싸운 얘기도 하고요. 길거리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합니다. 도대체 갑자기 찾아와서는 웬 쓰레기 얘기? 그래, 쓰레기 좀 버린 게 뭐 어쨌다고? 레이는 우나의 갑작스런 방문이 불편하고 힘들기만 합니다. 어서 빨리 자기 앞에서 꺼져버리길 바라죠. 심지어 레이는 우나가 자기를 죽이러 왔다고까지 의심합니다. 둘은 재회하자마자 서로에게 으르렁거리고 상처를 줍니다. 우나는 정신과의사들로부터 레이가 가해자이니 증오하라고 교육받았습니다. 그녀는 정신과의사들의 처방대로 따랐고 증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마치 진짜로 칼을 빼들고 가슴 깊이 찔러 넣은 다음 휘저어서 상대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습니다. 공격은 우나의 몫이고 방어는 레이의 몫입니다. 하지만 우나는 증오하기보다는 만나서 묻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날 밤 왜 자기를 버리고 갔느냐고요. 이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공격이 쓸데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두 사람은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결국은 15년 전, 그날 밤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실 그날 밤 너무나 경황없이 체포돼서 서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모른 채 헤어졌으니까요. 둘 다 한 번쯤은 그날 밤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혼자가 된 뒤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각자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구멍 나 있던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가자 의외로 쉽게 그날 밤의 정황이 환히 드러납니다. 진즉에 알면 좋았을걸. 아, 그랬군요.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든 건 다 오해였고 정말로 사랑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레이는 소아성애자가 아닌 게 확실하고요. 우나는 자신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휴게실에 어질러져 있는 쓰레기들을 발로 차버릴 수도 있게 됩니다. 쓰레기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그에게 키스하고 다시 사랑을 나누자고 합니다. 그녀에게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전기가 나가고 어둠에 갇힙니다. 레이는 전기가 왜 나갔는지를 알아보려고 나가고 우나는 혼자 어둠 속에 남겨집니다. 15년 전, 혼자 남겨진 것처럼요. 버려진 거라는 생각에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녀는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다는 상처가 있군요. 마치 자신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트라우마가 있고요.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환해졌습니다. 레이가 돌아왔고요. 하지만 곧이어 놀라운 반전이 펼쳐집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반전이지요. 그 반전 때문에 지금까지 했던 레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의심스럽습니다. 레이는 왜 감옥에 가서 그렇게 소아성애자에 관한 책들을 읽었던 걸까요? 레이가 일하는 회사의 수위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책을 많이 읽을까요? 레이는 정말 그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걸까요? 레이의 모든 말이 진실 같기도 하고 거짓 같기도 합니다. 뒤죽박죽입니다. 모든 게 너무나 애매하고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작가는 관객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을 택했습니다.
레이는 이제 그만 떠나려고 합니다. 우나는 그런 레이를 붙잡죠. 하지만 레이는 우나를 쓰레기 버리듯 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 뛰쳐나갑니다. 우나는 정말로 바닥에 쓰레기처럼 버려져버리고 맙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우나는 일어납니다. 우나는 열두 살 소녀가 아닙니다. 더 이상 15년 전처럼 버려졌다고 버려진 채로 울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야지요. 그녀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쫓아갔습니다. 그녀가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거울에 비추는 것으로 공연이 끝납니다. 우나는 레이를 왜 쫓아간 걸까요? 우나는 레이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이번에 공연된 「블랙버드」는 최신 해외 작품의 초연 무대라는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연극열전2에서 상업적인 작품뿐 아니라 깊이 있는 작품도 발굴해서 공연하겠다는 의도로 선정됐습니다. 저자인 데이비드 해로워David Harrower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영국의 신예 극작가입니다. 2007년에 이 작품으로 미국의 토니상과 견줄 만한 영국의 로렌스 올리비에 베스트 희곡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신문 기사 한 줄을 가지고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가 보봐리 부인을 창조했듯 몇 년 전 미국과 영국 신문에 큰 충격을 몰고 오며 떠들썩하게 실렸던 30대 후반의 나이 든 남자와 10대 미성년 소녀의 섹스라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해서 ‘우나’와 ‘레이’라는 인물을 창조해냈습니다. 과연 사랑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치유해주고 욕망을 해소해주는 행위일까요? 혹시 그 정반대의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요?
연극 「블랙버드」는 여자 우나와 남자 레이를 통해 가장 극대화된 형태의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극대화된 사랑을 보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어린 시절 받은 트라우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사랑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 연극의 제목으로 쓰이는 블랙버드Blackbird는 ‘지빠귀 무리의 새 이름’ 외에 미국에서 사용하는 속어로 ‘흑인’ ‘노예로 팔기 위해 유괴된 카나카 사람’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족 이 작품 「블랙버드」의 공연에 앞서 조재현 프로그래머가 직접 무대에 올라 공연 관람시의 예절과 작품에 관해 간략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재현이라는 또 한 명의 스타를 무대 위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연 볼 때 핸드폰을 끄지 않는 게 어떤 행동인지도 너무나 뇌리에 박히도록 잘 알게 됐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해서 인용하겠습니다. “공연을 볼 때 핸드폰을 끄지 않는 것은 목욕탕에 가서 똥을 누는 것과 같습니다. 본인은 시원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곤혹스러우니까요. 특이 2인극일 때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데 무척 외롭습니다. 핸드폰 진동 소리에도 크게 흔들리고 맙니다. 핸드폰 완전 꺼주십시오.” 너무 웃기게 이야기해서 다들 요절복통이었습니다. 무대 위로 올라온 조재현 프로그래머를 보고 관객들의 함성이 이어졌으리라는 건 예상대로고요. 다들 함성 지르고 휘파람 불고 핸드폰 들고 사진도 찍었고요. 이번 연극열전2에 대한 그의 열의를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연출가 이영석은 제목 ‘블랙버드’에 대해 성경에서 죄인의 눈을 쪼아먹는 새를 뜻하는데 주인공 우나와 레이가 십수 년이 지나도록 헤어나지 못하는 죄책감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그 외에 비틀즈의 노래 「블랙버드」 속에서는 ‘날지 못하는 새, 새장 안에 갇힌 새‘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안현주 bread-wine@hanmail.net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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