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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극작가와 연출가들의 분신과도 같았던 햄릿은 그동안 원전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려 정체성을 잃었다. 우유부단하고 고뇌에 찬 인물을 두고 ‘햄릿’이라 불러도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난해한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햄릿이 이러한 장르혼용 속에서 이미지와 장치를 얻는 대신 시적인 언어와 인간 본연의 갈등구조, 그리고 배우의 셰익스피어적 햄릿의 해석을 잃어야만 했다. 그래서 여기 햄릿의 원점으로 돌아가 배우와 대사만 남긴 햄릿을 재현한 연극이 있다. 2월 17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골목길 햄릿’이다.
이상한 햄릿, 더 이상한 ‘골목길 햄릿’
연극 ‘골목길 햄릿’은 의상과 무대세트는 물론 소품까지 배제한 이상한 연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목길 햄릿’은 흔히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배우, 무대, 관객이라는 연극의 3요소는 갖추고 있다. 아니 이 기본적인 요소를 제외한 모든 장치들을 제거했다고 볼 수 있다. ‘골목길 햄릿’의 이상한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대의상이 검은 정장뿐이라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찾은 관객은 연극을 보는 내내 등장인물들의 검은 양복과 보이지 않는 소품 위로 수많은 햄릿과 다양한 장치들이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햄릿의 아버지 유령처럼, 관객의 내면에 수많은 햄릿의 이미지가 무대 위 배우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시골소녀 같은 오필리어를 연기한 배우 권방현의 연기는 Millais의 유명한 ‘오필리어’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꽃과 풀로 얼룩진 배경에 늪에 가까운 초록색 강물 위에 분홍색 꽃을 들고 죽어가던 오필리어의 모습이 검은색 치마정장을 입고 있는 골목길의 오필리어 위로 겹쳐진 것이다. 지금까지 햄릿은 연출가나 배우들에 의해 ‘만들어진 햄릿’으로서 각인되었다. 그러나 골목길 햄릿은 배우라는 캔버스 위로 관객들이 다양한 상상과 기억 속의 햄릿을 그려 넣을 수 있는 연극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골목길 햄릿은 그야말로 실험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원전에 바탕을 둬 햄릿의 원점으로 돌아가려 한 연극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다만 햄릿이라는 텍스트에 충실했을 뿐, 그 외적인 요소들은 한 결 같이 관객의 연상으로 이루어지는 고난도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상과 소품의 공백
그동안 소품과 의상이 주를 이루던 햄릿을 접했던 관객들은 이쯤에서 궁금해질 것이다. ‘햄릿의 아버지를 죽인 독약은? 햄릿과 오필리어의 편지는? 햄릿이 아버지를 만났던 성 망루는? 그리고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에서 사용된 독배와 칼은?’ 이런 수많은 의문으로 벌거벗은 햄릿 왕자의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다. 유일한 세트이자 소품이었던 큐빅의 사용은 적절했다. 기도대가 되었다가 왕좌가 되었다가 또 왕비의 침대가 되기도 했던 일곱 개의 큐빅은 배우들의 열연에 힘을 실어준 장치가 되었다. 특히 중심이 되었던 'ㅗ'자 모양의 큐빅은 햄릿이 말했던 ‘너희들의 하나님’과 세상이 왕으로 선택한 이의 권좌가 등이 붙어 있는 구조로 권력의 양면적 의미를 완벽히 재현했다. 그러나 햄릿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장면에서의 독배를 드는 장면과 칼싸움 장면은 확실히 우려했던 그대로였다. 원전의 재현까지는 좋았다. 알몸만 남은 햄릿을 그리려 했던 연출의 의도도 극의 흐름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독배를 드는 장면과 칼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배우들이 마임에 가까운 연기를 하지 않는 한, 어색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가령 왕비 역을 맡은 여배우가 아들 햄릿의 승리를 위해 독배를 드는 장면에서는 마치 소주잔을 집는 듯 손동작이 어색했으며 잔을 입에 댈 때부터 마실 때까지의 속도가 너무 빨라 빈 잔의 공기를 마시는 듯했다. 칼싸움 장면 또한 극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너무도 힘차게 잘 달려온 레어티즈와 햄릿 역의 배우들이 보여준 명연기에 흠집이 갈 정도로 어딘가 아이들 장난 같고 긴장감이 떨어졌다. 이것은 연출의 미흡함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앞으로 극단골목길에서 햄릿을 공연한다면 어떤 햄릿을 내세울지 모르겠으나 이번 공연과 같은 벌거벗은 햄릿을 공연한다면 이 부분만큼은 보완해야할 듯싶다.
햄릿과 오필리어의 발견
이번 ‘골목길 햄릿’은 배우의 열연만으로도 충분히 극단 골목길이 의도했던 배우의 발견이 어느 정도 성공을 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배우의 발견은 정확히는 주인공 햄릿과 오필리어의 발견이 되었다. 햄릿 역을 김주완은 그야말로 완벽한 햄릿이 되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햄릿의 의 언어가 되었고 그만의 리듬이 곧 햄릿의 리듬이었다. 그의 눈빛도 압권이었다. 배우 김주완은 연극 무대에서 모처럼만에 만난 살아있는 배우의 눈빛을 보여주었다. 기쁨과 절망의 양 극단은 물론 외로움과 고독까지 표현해야 하는 햄릿의 내면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표현했다. 그 눈빛을 따라 움직이는 김주완의 몸짓은 시간이 갈수록 검은 양복만 걸치고 있는 그의 몸 위로 12세기 덴마크 왕자 햄릿의 이미지를 덧씌울 만큼 완벽한 연기가 되었다. 오필리어를 연기한 권방현의 연기도 좋았다. 동양적인 얼굴의 권방현 또한 오필리어의 대사를 나지막하고 순수한 소녀의 언어로 연기했으며 때론 곱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느낌이 좋았다. 또한 정신이 나간 오필리어를 연기를 할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극에 대한 몰입도가 뛰어난 배우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햄릿과 함께 오필리어가 되어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우가 중심이 된 연극
햄릿의 언어는 어렵다. 단어가 어렵거나 난해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사를 외운 티가 나지 않게 정확히 읊는 동시에 고전적인 인물들의 극적인 감정표현까지 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무엇보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국의 이름과 지명들, 속사포처럼 읊어야 하는 운문의 긴 대사가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걸림돌이 된다. 때문에 소품과 의상에 기대지 않고 오직 연기력에만 기대야하는 ‘골목길 햄릿’의 초반은 조연 배우들이 사람을 사랑으로 발음하는 등 자주 대사를 틀려 관객의 집중을 떨어뜨렸다.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틀린 대사를 다시 연기할 때 좀 더 자연스럽게 처리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리고 몇몇 배우들은 시선은 관객에게 고정되어 있지만 극에 몰입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역할에 얽매여 오히려 자신이 맡은 역과 분리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 햄릿의 누구누구를 연기하는 배우라는 자각이 더 뚜렷해 보이는 배우였다. 햄릿 역의 김주완이 시선을 관객석에 고정하고 있음에도 흔들림 없이 햄릿에 몰입한 것과는 비교가 되는 연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 또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연기하는 연극의 맛이기도 하다. 비로소 극단 골목길이 추구하는 배우중심의 연극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벌거벗은 무대 위에선 몰입해 있는 배우와 발전 가능성이 농후한 배우만이 남는다. 배우들의 현재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지켜보는 것 또한 햄릿을 즐기는 방법인 것이다. ‘골목길 햄릿’의 배우중심의 연극은 배우들의 나이도 허물어버렸다. 햄릿과 오필리어, 그의 어머니와 삼촌은 동년배의 배우들이 연기했다. 분장도 하지 않고 그들은 단지 검은 정장만 입고 있었지만 연기를 통해 충분히 연령의 구분이 가능했다. 나이를 파괴한 골목길 햄릿의 의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늙고 교활한 재상이자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우스는 햄릿과 동년배의 여성이 연기했다. 게다가 그의 아들 레어티즈는 햄릿과 폴로니우스보다 나이가 훨씬 더 들어 보이는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
그때 그 시절 햄릿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배우들의 검은 정장은 시대가 죽여 버린 순수한 햄릿을 추모하고자 하는 극단 골목길의 의기투합처럼 느껴졌다. 아울러 텍스트와 이미지는 물론 그 의미와 정체성마저 사라져가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극단 골목길의 배우들이 그 원전의 정신을 지키겠다는 다소 도발적인 선언과도 같았다. 그러나 ‘골목길 햄릿’ 또한 지금까지 필자가 작성했던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는 숙명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완벽한 햄릿이란 셰익스피어가 직접 무대에 올린 작품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죽었고 햄릿의 대본 또한 작가 사후에 이루어진 편집 등으로 수없이 바뀌고 변형된 판본이다. 어떤 햄릿을 그리든, 원점으로 돌아간 햄릿은 없다. 돌아간다는 자체가 해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목길 햄릿이 반갑고 고마웠던 이유는 다름 아닌 햄릿을 처음 접했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복원 때문이다. 연출자조차 알 수 없던 필자가 처음으로 햄릿을 접했던 십대 때의 그 순수한 이미지 말이다. 햄릿을 알게 된 후 필자에게 더 이상 덴마크 왕자 햄릿은 없었다. 우유부단한 A형의 햄릿, 가죽바지를 입고 록음악을 부르는 햄릿, 혁명가가 된 햄릿 등, 기억 속 햄릿의 이미지는 실험과 전복의 지루한 반복으로 어딘가로 숨어버린 유약한 캐릭터였다. 그래서 배우들이 읊어대던 원전, 그 순수한 에테르의 햄릿이 너무도 고마웠다. ‘골목길 햄릿’은 앞으로 관람할 수많은 햄릿으로 가는 여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정효진 객원기자 dugongj@naver.com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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