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미소로 가득한 단란한 가족의 모습.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의 포스터는 대부분의 사진관에 하나씩 걸려 있곤 했던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행복한 날들의 반짝임은 이제는 먼 과거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공연 내내 ‘부웅부웅’ 울려 퍼지던 무적 소리와 창문 너머로 자욱이 껴 있던 안개는 이들 가족의 음울한 여로를 암시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부서질 대로 부서진 이들의 희망은 아련한 등대 불빛 속에서 처연하게 빛난다.

리얼리즘의 지독한 비극성
타이런과 메어리의 소소한 대화 뒤로 들려오는 제이미와 에드먼드의 웃음소리. 언뜻 봤을 땐 평범하기 그지없는, 단란한 가족의 아침 풍경으로 극은 시작된다. 하지만 억지로 명랑함을 유지하려는 메어리와 지나치게 아내의 안위에 신경 쓰는 타이런의 모습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극은 불안의 정체를 은폐한 채, 막내아들 에드먼드의 병환에 대한 우려로 주의를 끈다. 하지만 어머니 메어리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세 부자는 메어리의 비밀로 인해 서로 언성을 높인다. 피아니시모에서 메조포르테로 치닫는 긴장감에 관객들은 숨을 죽이며 이들을 지켜본다. 화목함으로 포장된 타이런가의 실체는 가족 구성원들의 치고받는 대사 속에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만을 고집하는 타이런과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보들레르의 시구를 읊는 에드먼드의 대화는 이들의 뿌리 깊은 갈등과 고뇌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극은 “묵은 슬픔을 눈물과 피로 썼다”는 유진 오닐의 말처럼 불행에 가득한 회환의 기억으로 점철돼있다. “나 자신이 끔찍해서 누구한테라도 복수를 해야만 해. 특히 너한테”라며 절규하는 제임스의 모습과 극의 마지막, 메어리가 오필리어로 분장한 채로 웨딩드레스를 손에 들고는 “성모 마리아님은 용서해 주실까요. 이런 나를, 아편쟁이인 나를… 왜 우리의 행복은 트렁크 안에만 머물러 있는 걸까요. 전 한 연극배우를 사랭했었어요. 한동안…”이라고 읊조리는 모습은 진실의 잔인한 심연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정극의 묵직함과 배우들의 농도 짙은 호소력
180여분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의 세트만으로 진행되는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품성과 배우 5명의 연기력만으로 관객과 소통한다. 긴 대사와 느린 호흡은 관객들의 인내심의 한도를 가늠하는 듯하다. 하지만 1막과 2막의 미묘한 불안감은 점점 극에 치달아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육중한 무게감으로 관객들을 엄습한다. 점점 표면화되는 갈등 속에 그려지는 이들 가족구성원들의 히스테릭한 모습은 빳빳하게 날이 선 종이에 무심코 손을 베여버린 듯한 아픔을 전달한다. 정극의 묵직함과 절제미는 막이 내린 후에도 끝나지 않는 오랜 여운을 남기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배우들의 농도 짙은 연기 또한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타이런역의 배우 김명수는 명료한 음성과 발성으로 관객들을 극에 몰입시키고, 하녀 캐슬릭역을 맡은 배우 서은경은 촌스러운 말투와 독특한 목소리톤으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제이미역의 배우 최광일은 광기어린 연기로, 배우 김석훈은 안정적인 연기로 무대의 중심축을 잘 잡아낸다. 다만 메어리역의 배우 손숙은 평소의 단아한 이미지 때문인지 메어리의 저변에 깔려있는 발작적이고 히스테릭한 심연까지는 끌어올려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박소연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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