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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호가 만난 사람] 러시아 최고의 국민가수 ‘아니타 최’를 만나다(2)

 

영월에서 열린 제3회 국제 유카위 국제 심포지엄(세계대학총장문화교육심포지엄. 6월18일 ~ 24일) 개막식 전야제 ‘코리아의 밤’ 공연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러시아 국민가수 아니타 최를 만났다.
1999년 KBS 스페셜에 방영되면서 한국에 알려진 아니타 최는 발레리 이바소브의 50주년 콘서트에서 빅토르 최에 대한 헌정곡인 <비상(FLIGHT)>을 부르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8년에 러시아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프레미어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러시아 최정상급 가수에게만 공연이 허용되는 러시아의 명예의 전당인 ‘러시아 콘서트홀’ 공연도 수차례 가진 바 있다. 공훈예술가, 국민가수 칭호까지 받은 아니타 최는 가수 활동 이외에 많은 사회 봉사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공연 계약을 체결한 가수이기도 하고, 세계적 규모로 쇼를 하는 것도 유일한 가수로 ‘러시아의 마돈나’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전했다.

지 러시아에서는 공연을 많이 하셨구요. 한국 무대에서 제대로 공연을 한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요. 반응에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최 그 차이점은 분명히 있구요. 이번 공연에서 신곡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 한국 사람들이 저를 볼때 약간 외계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웃음) 한국 사람은 맞는데,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노래를 하니까요. 처음에는 긴 의상으로 몸을 가리고 나오고, 순종적으로 눈도 조신하게 깔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짧은 스커트에 선정적인 의상을 입고 열광적인 쇼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이 ‘도대체 저 사람은 뭐지’, 하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웃음) 서양인 같은 백댄서들이 나왔을때는 당연한 것이라고 느끼겠지만, 댄서들이 춤출때 반응들이 열광적이었던 것 같은데요. 댄서들은 아무런 이상한 느낌 없이 환호를 받았는데, 제가 나왔을때는 신기한 느낌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 호기심어린 시선도 느꼈지만,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는 것도 함께 느꼈습니다.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구요. 그런데 이런 것은 처음 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니타가 뭔가 한국말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부족해서 ‘사랑합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런 얘기 정도 밖에 못했습니다.(웃음) 그리고 친척들이 콘서트장에 오셔서 너무 행복했구요. 거기 계신 관객 모두가 너무나 많이 환호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저보다 친척들이 더 긴장을 했는데,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고마웠는데요. 친척들이 너무나 많이 환호해주고, 응원해줬어요.

지 아까 개막식이 끝나고 한국과 러시아의 교류에 이바지해줘서 감사하다는 의미의 상을 받으셨는데요. 거기서 ‘한국과 러시아하면 가장 큰 접점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타 최’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2004년 9월 한국문화관광 홍보대사로 위촉되셨는데요. 아직도 한국과 러시아는 멀게 느껴지는데요. 문화적으로 가깝게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신 일들은 있으신가요?
최 한국에서 잘 눈치를 못채고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러시아에서 한국 문화 대중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잡지나 다큐멘타리 영화, 토크쇼 같은데 제가 한복 입고 나가서 한국 전통 노래 같은 것도 부르고, 김치, 된장찌개, 불고기, 국수 등 한국 요리를 하는 것도 보여주고, 전통적으로 한국 가족들이 하는 행사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로 한국 대사관이 감사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관광객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하구요. 많은 러시아인들이 제 인터뷰를 보고 한국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신기해하는 부분은 한국 가족들은 어떻게 같이 계속 살 수 있는지 하는 점인데요.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한지 20년인데, 러시아는 워낙 이혼율이 높아요. 아마 한국인이라서 가정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러시아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 한국도 이혼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요. 전통을 한국보다 더 잘 지키고 있는 셈이네요.(웃음) 홍보대사를 하는 동안 한국 정부로부터의 지원은 충분했나요? 사실 대한민국 정부가 재외동포들을 챙겨주거나 따뜻하게 대해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섭섭하거나 한 생각은 없으신가요?
최 지원 같은 것은 전혀 요청을 한 적은 없었어요. 정부는 할 수 있는 차원에서 많은 것을 하고 있는데, 특히 정부 차원에서 사할린 동포들 영구귀국에 많은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평생 꿈꿔왔던 귀국이었거든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을 평생 꿈꿔왔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줘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 부분에서 계속 정부가 지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 젊고, 에너지도 많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있고, 제가 정부의 지원을 받기보다는 지원을 해주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 1937년 카레이스키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 시키는 등 억압이 있었지 않습니까? 아니타 최와 남편의 할아버지들도 강제 이주를 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것을 어떻게 버티셨다고 생각하세요?
최 일단 아주 긍정적이신 분이구요. 굉장히 낙천적인 분이셨어요. 바퀴벌레 같은 것이 죽은 것도 프랑스 향수 냄수가 난다고 하셨어요.(웃음) 원래 성은 김이예요. 한국 성이 짧아서 좋았어요. 러시아에서는 결혼하면 성이 바뀌잖아요. 러시아 옛날 지하철에 보면 kim이라고 쓰여져 있는데요. ‘kommunist youth international’ 이라는 뜻이었어요. 제 성이 어디나 붙어 있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웃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려움이 너무 많았어요. 학교에서 많이 놀림도 받고, 제 아들도 놀림을 받기도 하고, 제 의사를 표현하기보다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구요. 어머니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승진을 못한다거나, 고위직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사촌 여동생도 은행에서 일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도 승진에서 어려움이 있어요. 하지만 사람이 뭔가 간절히 원하면, 그리고 노력을 한다면, 잘 만들어갈 수 있도록 생각하고 노력을 한다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러시아에 유명한 고려인들이 정말 많아요. 학자, 오페라 가수, 작가, 기자, 정치가, 쇼비즈니스 하는 가수 등이 있습니다.

지 어머니 엘로이자 여사는 화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재원이지만, 당시 사하로프 박사 사건과 연루되어서 이혼도 당하고 고초를 겪으면서 홀로 자녀를 키우지 않았습니까?
최 말씀하신대로 화공학 박사셨구요. 사하로프 박사님과 같은 대학에서 일하셨어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굉장히 뛰어난 물리학 박사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하로프는 구 소련 시대에 당국에서 ‘국가의 적’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때 놀랬구요. 그 중에서 어머니가 유일하게 사하로프를 지지하셨어요. 솔직히 별 것도 아니었고, 단지 화학공학 박사였을 뿐이었는데,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죠. 어머니는 이혼하셨고, 사하로프는 고리키로 보냈구요. 어머니는 정신 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사회랑 단절시켜놓고, 가족들과 대화도 못하게 했습니다. 가족들한테는 ‘어머니가 아프다, 사하로프는 국가의 적인데 유일하게 옹호하니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독한 약도 많이 투여를 했구요. 그때 저는 아주 어렸었고, 어머니가 병원에 갔다가 오실때마다 ‘나는 정상’이라고 얘기한 기억이 있습니다. 의사를 믿지 말고, 아무한테도 나를 넘겨주지 말라고 얘기했습니다. 다시 정신 차리면 또 다시 사하로프를 지지했습니다. 사하로프가 단식 투쟁을 한 적도 있는데, 어머니가 음식을 많이 가지고 고리키시에 갔습니다. 기차를 타고 갔는데, 거기서도 의사가 계속 감시를 했습니다. 다시 병원에 입원시켰고, 여러번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그러고 몇년이 지났죠. 그때는 어머니 건강도 많이 악화되어 있었구요. 한번은 집에서 쇼파에 앉아 같이 TV를 보는데 어머니는 거의 식물 인간 상태였죠. 그때 TV로 고르바초프가 ‘사하로프는 무죄’라고 선언을 해서 명예회복을 시켜줬습니다. 그때 뭘 봤는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식물인간이었던 엄마가 일어나서 쇼파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때 엄마가 정상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엄마가 항상 한국에 오고 싶어 하셨어요. 그런데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서 한국에 올 수가 없었어요. 그 해 여름 어머니가 어떻게든 고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지금 이른살 정도 되셨는데요. 비행기를 힘들게 타고 왔습니다. 여기 한국에 왔을때 처음으로 마중했던 사람들이 의사였어요. 그래서 그때 여행을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생활하시면서 좋은 시간 보내셨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건강이 안좋은 상태에서 여행도 하시고, 건강한 케이스는 처음봤다고 했는데, 다시 모스크바에 가셔서 계속 행복해하셨어요. 한국의 의사들과 가이드들의 인간미를 많이 느끼셨다고 합니다. 이 분들이 같은 민족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해요. 어쩌면 두번 다시 한국에 못 오실 수도 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인 한국행일 수도 있지만, 고국을 한번 방문하신 것 자체가 기쁘다고 얘기하십니다.

지 ‘마마’ 같은 경우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가족의 아픔을 드러내는 러시아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노래라고 평가받고 있는데요. 그 노래를 부르시면서 어머니 생각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최 아니예요. 사실 그 노래는 제 어머니에 대한 노래가 아니예요. 대학교 다닐때 제 전공이 취학전 아동의 교육이었는데요. 여름에 하는 어린이 캠프에 참석했어요. 그때 제가 맡은 그룹은 고아원에서 온 아이들이었어요. 그중에서 작은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어른들을 너무 좋아했어요. 그런 애들을 힘든 아이라고 하는데요. 머리도 되게 부시시하고, 개구쟁이였고, 말썽꾸러기였어요. 어른을 볼때마다 너무 귀찮게 굴고, 뭘로 찌르고 그랬습니다. 제가 아동 교육을 전공했으니까 그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죠. 여러 배운 이론을 적용해서 노력을 했고, 여러 유명한 교사들의 이론을 적용해 봤지만, 무용지물이었어요. 사탕, 장난감 등 그런 것으로 환심을 사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 반응도 없었구요. 캠프가 끝나고 아이들은 떠났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편지가 하나 왔어요. 노트를 찢어서 삐뚤빼뚤한 글씨로 ‘엄마, 사랑해’ 이렇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 남자 아이가 보낸 편지죠. 그래서 내가 했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편지에 많이 감동을 해서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10분만에 곡을 썼습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거죠. 그 노래를 가지고 11년째 자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는 아니타라는 이름의 아이들 자선기금 단체가 있어요. fondanita.ru를 치면 나옵니다.

지 빅토르 최처럼 자신의 직접 쓴 가사와 곡에 폭발적인 가창력을 가졌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음악 공부를 전공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최 그 부분은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음악 이론은 배울 수 있지만, 그 가사를 적는 기술 이런 것은 전혀 배운 것이 없어요. 노래는 탄생하든지, 아니면 안되든지 둘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음악, 작곡, 작사를 따로 한 적은 없어요. 세가지가 동시에 탄생됩니다. 저도 전문적인 작사, 작곡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주문을 받아서 노래를 써본 적도 없고, 쓸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가장 아플때 노래가 나오는 것 같아요.

지 자기가 부를 수 있는 노래의 어떤 영감이 떠오를때 곡이 만들어진다는 거군요. 가사를 만들때 어떤 것들을 염두에 두십니까? 러시아의 상황이나 사회적인 느낌을 전해준 노래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최 러시아의 사회에 관해 얘기했다고 할 수 있는 곡은 하나 있었는데요. 라디오에 가지고 갔더니 내보내지 않고, 금지당했습니다. 옐친 시대에 대해서 노래했거든요. 제목이 ‘블랙 나이트’라는 노래인데, 가사가 ‘골목 구석구석에는 경찰들이 서 있고, 대통령은 도로를 달리고, 다리 잘린 아프간 병사들이 서 있고, 도시에는 안개가 있다’ 이런 내용이었는데요. 사회성 짙은 노래였어요. 혁명적인 분위기도 있구요. 사실 제가 정치쪽으로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다른 노래는 모두 사랑에 관한 노래거든요. 제 노래를 전혀 정치와 결부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러시아는 한국보다 훨씬 크고,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구요. 그들의 공통적인 것이 다 서로 사랑을 하고 싶어하구요. 사랑을 받고 싶어하구요. 행복해지고 싶어하구요. 늙거나 아프거나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나 자녀들이 행복하길 원하구요. 저는 그것을 노래하길 원합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매 순간 순간 그것을 원하고 있잖아요. 저는 그런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노래를 좋아하고, 그런 노래를 대부분 하는데요. 예전에 러시아 국가를 불러달라는 대통령의 요청을 받았어요. 그때 당시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가수 스무명을 초청했어요. 각자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국가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멜로디도 자기만의 스타일대로 바꿔 불러도 된다는 요청이었구요. 가사 하나하나가 듣는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지금 러시아 국가는 구 소련 시대의 국가와 멜로디는 똑같아요. 가사만 새롭게 바뀌었거든요. 사람들이 새 가사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옛날것에 익숙해져서 못 외웠거든요. 그 중에서 선택된 것이 제가 부른 곡이었어요. 라디오 신청곡을 하는데, 그게 러시아 국가인줄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신청을 했습니다.(웃음) 매일 매일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침 여섯시, 열두시에 제가 부른 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어요. 물론 불만도 많았죠. ‘왜 한국 사람이 러시아 국가를 부르냐, 러시아 사람도 많지 않느냐?’고 했는데, 그 소리를 금방 없어졌어요. 아직도 제가 부른 국가는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글. 지승호 sibidori@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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