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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가지 친 골계미(滑稽美)의 진수, 연극 ‘이(爾)’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으로 널리 알려진 연극 ‘이(爾)’가 지난달 초 문을 연 대학로예술극장의 개관작으로 선정되어 관객에게 선보였다. 영화로 유명세를 얻긴 했지만 ‘이’는 2000년 초연 이래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꾸준히 무대에 오른 작품이다.

연극 ‘이’는 공길이란 광대가 연산군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역사서의 한 줄 기록에 착안한 팩션사극으로, 연산과 공길의 동성애 관계 속에 조선 최고의 광대 장생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끼워 넣은 극적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 ‘왕의 남자’가 장생을 중심으로 공길과 연산 세 사람의 미묘한 감정과 내적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연극 ‘이’는 연산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개인적 욕구와 사회적 성취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다.

다 가졌으나 껍데기뿐인 왕 연산, 자존감을 애써 억누르고 권력 앞에 고개 숙이는 공길, 자유롭고자 하나 신분의 한계로 인해 날개가 꺾이는 장생,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녹수 등. 실제 역사의 바탕 속에 개인의 갈등과 계급 간의 갈등이 매끄럽게 교차하며 각각의 캐릭터는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영화와 가장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공길이다. 여리고 고운 심성을 지닌 미소년으로 그려진 영화 속 공길이 연정과 연민이라는 감정의 충돌로 장생과 연산 사이에서 흔들리는데 비해 연극 속 공길은 보다 권력 지향적이며 입체적인 인물. 장생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공길의 마지막 광대놀음은 성공을 위해 자신을 감추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초연 이래 연산 역으로 꾸준히 무대에 오른 김내하가 왕의 위엄과 나약한 인간의 광기를 노련하게 그려낸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 팔복과 칠득이로 등장해 웃음을 선사했던 이승훈과 정석용이 ‘이’에서는 긍지 넘치는 장생과 간사한 내시로 분해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뮤지컬 배우 출신의 신예 정원영이 공길 역을 맡아 열정적으로 연극 무대에 도전했지만 장생과 연산을 향한 공길의 미묘한 심리 묘사에 있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극중극 형태로 작품 속에 녹아들어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하는 광대극은 연극 ‘이’의 미덕이다. 웃음을 가장해 현실을 비꼬는 광대들의 한바탕 질펀한 놀음. 그것은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으로 웃음 뒤의 현실을 직시하며 관객에게 한국적 골계미(滑稽美)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또한 광대극은 연극 ‘이’가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을 투영케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2009 ‘이’의 경우 세태를 비꼬는 통렬한 풍자는 다소 줄었지만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의 쏘리 댄스가 삽입되고, 임금이 죽으면 떡을 돌린다는 등의 발언이 차용되어 깜짝 웃음을 선사한다. 당시의 사회적 흐름을 반영해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제작진의 고민은 앞으로도 ‘이’의 텍스트를 발전시킬 것이다.


조수현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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