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연극제 30주년 기념작 ‘흉가에 볕들어라’가 지난 5월 7일부터 17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이 작품은 1999년(연출 이기도)에 초연되어 2000년 ‘서울연극제 공식 초청공연’ 및 ‘한국 대표희곡 선정’, 2001년 ‘제37회 백상 예술대상 신인 연출상’ 수상,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 공식 초청’ 등 수많은 평단과 해외 평론가로부터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올해는 한층 더 세련되고 섬세한 무대로 관객들에게 작품의 매력을 여과 없이 전달했다. 그로인해 관객들은 한국이 지닌 흥겨움과 연극적 묘미를 동시에 감상하며, 공연예술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은 색다른 무대를 경험한다. 양 옆에 하얀색 의상을 곱게 차려입은 ‘업구렁이’와 ‘업두꺼비’가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다. 무대 한 가운데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만들어진 흰색 길이 기다랗게 놓여있다. 그 길은 저승과 이승, 혹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시공간적 느낌을 부여하며 길 밖은 뻥 뚫어져 공허한 인상을 심어준다. 그 길은 오로지 주인공 ‘파북숭이’ 만이 통하는 길로 그의 앞날을 예견한다. 하지만 무대 공간은 그것만 사용되지 않는다. 주인공 ‘파북숭이’가 30년 전 몸담았던 ‘남부자’집으로 자신도 모르게 찾아갈 때 길이 사라지고 밑바닥에 숨어있던 흉가(과거 남부자집)가 서서히 드러난다. 이렇게 공간 활용을 보다 실용적으로 표현한 점은 무척 놀랍다. 이는 연출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한 이름은 너무나 어렵고 생소하다. 갖가지 잡귀들이 무대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한 번에 외우기란 쉽지 않다. 어찌 보면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이 작품은 극중극 형식으로 극을 지켜보는 ‘업구렁이’와 ‘업두꺼비’, ‘남부자’ 이외에 9명의 잡귀들이 등장한다. 9명의 잡귀 중 ‘파북숭이’는 유일하게 ‘남부자’와 내기를 하며 잡귀들 틈에 들어간다. ‘삼승할망-남부자처, 노마님’ ‘변소각시-남부자의 며느리’ ‘조왕부인-화출이’ ‘용단지-청지기 황씨’ ‘노적-운봉이 아범’ ‘바래기-남부자의 아들, 남희준’ ‘성주-뻐꾸기 아제’ ‘용왕-오맞이 댁’ 등이 바로 잡귀들이다. 이들의 이름 앞부분은 죽고 난 후에 붙여진 가신이름이고 뒷부분은 죽기 전 이름이다. 예로부터 가신신앙은 가택의 요소마다 신이 있어 집안을 보살펴 주는 것이라고 믿고, 이 신에게 정기적으로 의례를 올리고 있다. 작품은 한국의 민간신앙인 가신(잡귀)들을 사용함으로써 연극에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파북숭이’는 파를 지게에 잔뜩 짊어지는 실성한 인물로 우연히 30년 전 몸담았던 ‘남부자’집으로 가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그는 고통스런 과거를 회상하며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다 그 집을 지키며 대문귀신으로 살아간 ‘남부자’를 만나게 된다. ‘남부자’는 왜 자신의 집이 몰락했는데 그 까닭을 추궁하다가 결국 내기를 하게 된다. 가신 행세를 하며 집에 붙어사는 잡귀들에게 ‘파북숭이’가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절대 죽었다고 말로해서는 안되고, ‘남부자’ 자신을 끌어들여서도 안 되며, 새벽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 속에 ‘파북숭이’는 잡귀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30년 전과 똑같은 생활을 이어가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파북숭이’는 그때와 똑같은 일을 꾸민다. 처절한 죽음까지도…….
앞서 말했듯 총 12명이 출연하는 무대 세트는 적절히 배치되어 흉가를 연상시켰다. 왼편의 대문 위는 ‘남부자’가, 오른편에는 우물을 설치하여 ‘오맞이댁’이 지킨다. 무대 중앙 대청마루엔 ‘남부자 처’가 있으며, 지붕위에는 ‘남부자의 아들 남희준’이 앉았다. 그리고 그 옆 변소에는 ‘남부자의 며느리’가 반대편에는 ‘화출이’가 음식을 만든다. 또 맨 앞부분에는 ‘운봉이 아범’이 마당을 쓸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작품이 뜻하고자 하는 바를 적재적소에 맞게 말해준다. 더불어 무대 양 옆에서 극을 지켜보고 있는 ‘업구렁이’와 ‘업두꺼비’는 북과 꽹과리, 여러 효과음을 넣어주어 작품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들로 인해 작품은 더욱 실감나게 움직인다.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맛깔스런 연기력은 가히 기염을 토할 정도다. 특히 주인공 ‘파북숭이’ 역을 맡은 배우 한명구는 긴 대사를 불편 없이 소화했다. 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탄력 받은 호흡으로 관객들을 단번에 끌어들였다. 그 밖에 각자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내는 배우들(잡귀 역) 역시 작품의 흥을 돋구었다. 실제 사투리와 억양, 그리고 적절한 웃음코드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작품을 쥐고 흔들기까지 했다. 이는 전통의 방식을 현대로 끌어올린 연출가의 뛰어난 안목에서 비롯된 결과다.
박하나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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