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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특한 언어로 전하는 환상적 자아모험기, 페르귄트

 

파우스트풍의 편련극이라고도 알려진 입센의 희곡 ‘페르귄트’는 우리에게 낮설다. 사실 파우스트와 페르퀸트는 영웅의 유형에서부터 편련의 전개방식까지 차별되는 부분이 있다. 2008년 국립극장의 노르웨이 극단의 내한공연에 이어 극단 여행자와 양정웅 연출의 ‘페르귄트’가 LG아트홀에서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페르귄트적’자아를 찾아서

페르귄트는 허풍쟁이 영웅이다. ‘허풍쟁이 영웅’이라는 모순적인 단어 결합처럼, 극 속의 페르귄트의 일대기 또한 자신 안의 모순과 싸우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페르귄트의 한 쪽은 세상을 다 얻을 수 있는 의기 충만한 영웅이지만, 다른 한 쪽은 초라하고 외롭고 겁이 많은 허풍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페르귄트는 지독히 성장하지 않는다. 편력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페르귄트는 일생동안 여러 가지 모습을 한 인물들을 만난다. 하지만 인물과 페르귄트는 섞이지도 서로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귄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코 소통할 수 없는 이계(異界)의 인물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며, 주인공의 세계와 대립되는 세계는 화해 없는 강렬한 대치를 이룬다. 페르귄트가 세계와 화해를 이루는 것은 오직 마지막 순간의 구원의 여인 솔베이지를 통해서다.

페르귄트가 만나는 인물은 재미있고 환상적이고, 또한 매우 낮설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마주치는 인물들처럼 그들은 일반적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 속 인물의 형상화라기보다, 세계를 들여다보는 인식소들의 형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오세와 솔베이지를 제외한 인물들, 즉 인간계와 트롤계의 경계에 있는 4명의 여인, 트롤 왕과 공주, 원숭이, 단추공, 목사, 미친 사람들등이 더욱 그렇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마지막순간에 카드여왕과 대면하여 자기주장을 펼쳐야할 시험의 순간이 오듯이, 페르귄트에게도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의 순간이 찾아온다. 단추공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이태까지 그와 같은 미적지근한 삶은 주물국자에 녹여져야 한다는 말에 페르귄트는 사정하여 그에게 자기 자신을 증명할 기간을 얻어낸다.

앞서 말했듯이, 페르귄트는 일반적인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페르귄트 민중의 염원을 실현시켜주는 상승적 존재가 아니라, 민중의 밑바닥의 어둡고 연약한 얼굴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페르귄트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한번이라도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고민에 휩싸인 적 있는 사람, 혹은 이상적 자신과 현실의 자신의 모습의 괴리에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페르귄트의 고뇌와 발버둥이 이해되지 않을까.

양정웅은 독특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페르귄트의 다소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대사가 과감히 생략되고 그 자리를 현대적인 이미지들이 메꾼다.

-언어 하나, 오브제

무대는 하나의 놀이터 같다. 무대 바닥에는 모래가 잔득 깔려있고, 놀이기구와 같은 선명하고 광택 나는 소재의 사다리들이 무대의 여기저기에 놓여져 있다. 아무래도 단번에 시선이 가는 것은 무대 뒤편부터 위쪽으로 비스듬하게 걸린 12M의 거울이다. 이 거울은 무대를 압도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흐릿하고 환상적으로 거울에 비치고, 관객은 또 다른 각도에서 무대를 볼 수 있게 된다. 연극이 끝나고 인사를 한 배우들은 뒤를 돌아 투영된 자신의 모습들을 올려다본다. 거울은 곧 ‘이중적 시선’이 아닐까. 이야기가 실제 진행되는 곳과 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곳. 그리고 내가 내 자신으로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남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이처럼 페르귄트의 무대에서 일상속의 오브제들이 연극적 언어가 되어 무대 위에 등장한다. 앞서 말한 모래, 사다리, 거울등도 그러하지만, 연극 속의 소소한 오브제들을 찾아보는 것도 연극 페르귄트의 소소한 재미다. 솔베이지는 새하얀 옷과 새하얀 우산을 들고 등장한다. 이는 페르귄트의 검은 옷과 대비된다. 트롤들은 커다란 기저귀에 정장을 입고 고글을 쓴 모습이다. 노숙자가 된 페르귄트는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카트를 밀고 다닌다.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무대 위에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

-언어 둘, 신체

연극 페르귄트의 가장 큰 논란점(?)은 파격적인 신체 노출이다. 영화 ‘박쥐’의 송강호의 성기 노출이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페르귄트의 노출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꼭 필요했는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페르귄트의 노출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먼저 섹슈얼리티가 강조되는 부분에서는 여성들의 가슴이 노출된다. 또한 정신병자가 자신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 페르귄트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죽음에 몸을 맡겼을 때, 두 배우는 완전한 나체가 된다. 그것이 자신의 참모습을 찾은 환희이든 자신의 나약함에 굴복하는 놓아버림이든 간에, 바로 자신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 순간에 나체씬이 있는 것이다. 무대 위에 드러난 인간의 나체는 관객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신체란 인간의 가장 큰 공감대이다. 신체 노출은 소통하고자하는 언어의 하나로 본다면, 나체씬이 그리 뜬금없거나 불편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 외에도 연극에는 배우들의 단순한 몸짓에서 마임이나, 배우들끼리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장면등 공들인 신체언어가 가득하다.


강민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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