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 서울연극제 ‘한스와 그레텔’이 지난 5월 9일부터 1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극작가 최인훈이 1980년대 초연한 이 작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동화의 이미지와 달리 인간의 심리를 깊이 있게 파헤친 관념적인 연극이다. 이 작품이 동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바로 탈출의 원인(그레텔)이 같다는 것이다. 오로지 무대는 주인공 ‘한스 보르헤르트’만의 세계로 집중되어 관객들을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인다. ‘한스와 그레텔’은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과 작품성이 더해져 명품 연극의 진수를 확고히 짚어준 수작이었다.
작품의 주인공 ‘한스 보르헤르트’는 1945년부터 30년간 줄곧 감옥에서 생활한 시대의 불운아였다. 이 감옥에서는 ‘한스’와 그를 돌보는 ‘X’라는 인물 뿐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대는 입구부터 교도소 감옥처럼 꾸며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무대 양옆에 관객석까지 자리 잡아 교도소 공간의 심리적 압박감을 더해준다. 무대 왼편에는 작고 아담한 렌즈 테이블과 중앙에는 협소한 침대가 외롭게 놓여 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이라고 한다면 무대 오른편에 설치된 전축이다. 이 전축으로 ‘그레텔(부인)’이 선물한 ‘보리수’ 음악을 듣곤 한다. 이렇듯 무대는 교도소안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표현해낸다. 곳곳에 놓인 소품들은 비록 작지만 그에게 있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극은 현재의 ‘한스’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대를 넘나든다. 과거 독일과 소련이 전쟁을 일으킨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히틀러’의 비서였던 ‘한스’는 ‘그레텔’과 여행계획을 잡던 중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소련군과의 교섭을 시도한다. 결국 교섭은 이뤄지지 않았고 ‘한스’는 독일의 멍에를 안은 채 감옥에 들어간다. 이후 줄곧 30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생활한다. 그러다 그의 인생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X’에게서 상부로부터 ‘석방을 고려한다’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단 조건을 이행해야만 한다.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며,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극은 여기서부터 갈등적 요인을 만들어낸다. 나치정권의 신념을 따를 것인가, 아님 사랑하는 ‘그레텔’에게 돌아갈 것인가? 극 중 ‘한스’는 자신의 양손을 맞잡으며 밀고 당기는 것으로 내면의 고뇌를 심도 있게 표현했다.
여기서부터 출발한 갈등요인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요동친다. 극중 ‘X’는 “30년간 기다려온 그레텔을 생각해보라, 나 외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기도 한다”며 ‘한스’를 설득한다. 그러다 ‘히틀러’의 명령, 어린 시절 ‘그레텔’과의 추억, ‘그레텔’ 아버지인 ‘스토크만’의 충고 등 그 시절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뇌한다. 그 가운데 ‘그레텔’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다. ‘그레텔’은 “나는 언제나 당신의 것이에요, 당신의 뜻대로 따르겠어요”라는 글을 남기며 오히려 ‘한스’를 위로한다. ‘한스’는 과거 ‘그레텔’과의 결혼을 떠올리는데 “그녀는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나는 무엇을 주었지?”라며 깨닫고 석방조건에 동의한다. 하지만 ‘한스’는 또 다른 벽에 부딪힌다. 오로지 30년 감옥생활 동안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것을 자신이 만들어놓은 렌즈 안에 가둬둔 것이다. 렌즈는 자신의 기억이었으며, 내면의 세계였다. 그곳을 벗어나 새로운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된다. 이전의 갈등 요인이 신념의 충돌이었다면 이번에는 자아의 충돌인 것이다. 결국 그는 수많은 렌즈처럼 여러 명의 자신을 만들었다. 그 중 한명은 역사를 책임지기 위해 감옥에 남기고, 또 다른 한명은 ‘그레텔’과 함께하기로…….
이 작품의 갈등요인은 앞서 말했듯 하나가 아니다. 바로 신념의 충돌과 자아의 충돌,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을 파고드는 갈등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 같은 갈등을 연기하는 인물은 극 중 ‘한스 보르헤르트’ 역의 배우 남명렬이다. 그의 무게감 넘치는 연기력은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감히 광적인 연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갈등하는 모습에서 그의 그로데스크적 면모가 뚜렷하게 빛났다. 더불어 ‘X’ 역을 맡은 배우 이호성 역시 중후한 음성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이렇듯 두 배우가 펼치는 흡입력은 관객들을 단번에 끌어들여 작품 속에 잠식시켰다. 이번 ‘한스와 그레텔’은 기, 승, 전, 결의 탁월한 플롯 형성과 최상의 카타르시스를 경험케 했다. 다시 봐도 또 새로운 명작이다. 이런 경이로운 연극을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박하나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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