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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연극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Rear Window, 1954)’을 기억하는가. 다리를 다친 사진작가 제프리스는 무료함에 지쳐 건너편 아파트를 관찰한다. 물론 이 영화를 떠올리지 못해도 좋다. 누구나 어두운 밤에 불 켜진 남의 집을 흘끔 쳐다본 경험은 있을 테니까. 남들의 삶을 엿보고, 그로부터 동질감과 안심을 얻어가는 심리. 바로 유사성의 원리(Principle of Similarity)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을 보고 있으면 그런 근질근질한 쾌감이 든다.

무대 위에 있는 것은 바로 나와 내 이웃의 현실
‘유재석, 쟤 돈 많이 벌겠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저 TV를 보면서 남편한테 아무렇게나 건네는 말일 뿐이다. 시시껄렁한 잡담에 어울리는 평범한 어투와 발성. 배우들의 이런 자연스러운 연기는 리얼리티에 충실한 대본을 잘 풀어나간다. 종철과 선미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신혼부부다. 그러나 약간의 여유를 모아 한 달에 한 번쯤은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소박한 행복을 갖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기치 못한 아이가 생기자 부부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아이를 낳자는 선미와 경제력을 생각해서 아이를 지워야 한다는 종철의 입장은 굉장히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공연 초반부터 끊이지 않는 세밀한 리얼리티적 표현 덕분이다. 진짜 스테이크를 썰고, 지지리도 못 부는 색소폰 연주도 직접 들려준다. 실루엣이지만 부부의 은밀한 침대 위의 행각까지 무대 위에 나타난다.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배우 눈가에 붙은 먼지를 떼어내는 손길에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이 공연을 보고 있자면 내 현실을 보는 기분이다. 아스파라거스가 아니어도 맛있게 넘어가는 쪽파에서 느껴지는 인생의 달달함, 아이를 위해 뜨개질 할 때의 기대감, 침대를 발로 차서 무너뜨릴 때의 답답함 등 감정의 조각들이 마치 내 일인 마냥 가깝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것은 연극이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리얼리티라는 특성 하나로 마침표를 찍어놓지 않았다. 남다른 장면 전환 방식이 눈에 띈다. 장면을 전환하고 무대 세트를 이동하는 게 꾀나 부산스럽다. 다른 연극들처럼 분명한 암전도 없고, 그 흔한 배경음악도 없이 배우들이 덜커덕거리면서 세트를 이동시킨다. 이 방식은 어딘가 브레히트 (Bertolt Brecht)의 ‘소외 효과’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그는 관객들이 극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경계했다. 관객이 ‘이것은 연극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제 3자의 입장에서 비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이 효과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잠깐 잠깐의 거리 두기 덕분에 관객은 ‘참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구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팍팍한 돈 계산에 마냥 슬퍼하던 것은 잠시다. 공연이 끝날 때 즈음에는 어려움을 이겨봐야겠다는 의지와 삶에 대한 위로의 시선을 품고 돌아갈 수 있다. 한 발짝 물러난 이런 연출방식은 리얼리티극의 장점을 더욱 극대화하는데 일조한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없다
조용한 연극이다. 흑백 신문 쪼가리에도 나올 것 같지 않은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극이다. 이 극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따스한 온정이다. 특히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결정하기 위해 생활비 지출 예상 목록을 작성하는 부분에서 느낄 수 있다. 상대방의 소소한 행복을 지켜주려고, 자신의 취미생활을 없애는 모습이 더없이 따뜻하다. 미안해서 결국 엎어져 흐느끼고 마는 남편의 잔등, 색소폰은 팔지 말라던 아내의 자근자근한 목소리는 극장을 나오면서도 오랫동안 생각이 난다. 부인 ‘선미’는 극의 마지막에서 신문을 보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이라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 기사 하나를 읽어준다. 부족한 살림은 생각 못하고 아이를 낳자고 하는 아내를 남편이 목졸라 죽였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없다. 어딘가 한 구석이 늘 부족한, 그렇지만 그래서 내일이 살맛나는 그런 소복한 일상이 있는 ‘여기’만 있을 뿐이다. 결국 별다른 사건도 없이 잡담으로 끝나는 마무리는 연극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과연 현실과 연극 사이의 거리는 얼마만 할까.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그냥 현실 그 자체라서 밋밋한 것도, 불편하게 과장된 것도 아니다. 조용히 감동적일만한, 딱 그만한 거리. 이 소박한 연극이 내놓은 현답(賢答)이다.


백수향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 이은경 charmg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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