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유니버설 발레단의 ‘모던발레 프로젝트’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한스 반 마넨을 만나 그의 춤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07년 유럽 무용계에서는 한스 반 마넨 탄생 75주년을 기념하여 3주 동안 ‘한스 반 마넨 페스티벌’을 개최함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이 축제에는 네델란드 댄스 씨어터, 네델란드 국립발레단,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마린스키발레단(舊 키로프발레단) 등 10여개 발레단이 참여하여 25개의 마넨 작품을 올렸다. 살아있는 안무가에게 이러한 행사가 헌정되기는 드문 일이어서 그의 세계적 명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습 때 무섭기로 소문난 한스 반 마넨은 연습실 밖에서 의외로 유쾌한 사람이고 필자가 입은 옷의 브랜드를 한 번에 맞출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만남 내내 마주앉아 경청하고 있던 영상 기록담당자는 마넨보다 10살 이상 젊은 남성이었는데, 뜻밖에도 한스 반 마넨은 그를 자신의 남편이라고 소개했다. 아!...... 이렇게 비범한 삶을 살고 있는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흥미롭다.

(다음 글은 월간 ‘춤과 사람들’ 2008년 11월호에 개제된 글의 일부이다.)


-유니버설 발레단과는 조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문훈숙 단장이 어느 날 내게 연락해서 ‘블랙케이크’를 공연하고 싶다고 했어요. 줄거리는 없지만 유머가 있는 작품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에 흔쾌히 수락했지요. 같은 작품도 어느 발레단이 어떤 연출가를 만나는가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고, 클래식을 추던 무용수들이 코메디를 잘하기란 쉽지 않은데 유니버설 발레단과의 첫 리허설은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어느 단체든 새로운 안무스타일을 만나 배운다는 건 어려운 일이죠. 특히 제가 원작에 대해 완고한 편이라서 무용수들이 춤의 원작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표현에 있어서는 유머를 위해 자신의 개성을 실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번 작업 이전에 한국 무용수들에 대한 인식은 어땠나요?

현재 네덜란드에 한국 무용수가 서너 명 있고 지난 몇 년간 함께 작업해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지요. 김세연, 유서연, 한상이 등 모두 좋은 무용수이고 특히 김지영은 아주 훌륭한 무용수입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발레리나이고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국 발레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보시나요?

한국발레가 발전하려면 (외국 콩클에서 몇 등 했느냐가 아니라) 한국관객이 발전해야하는데 그러려면 수준 높은 작품들을 계속해서 새롭게 내놓아야 합니다. 클래식 발레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외국 단체공연으로도 만족될 수 있기 때문에 곧 클래식 이상의 단계를 기대게 될 것이고 그때를 대비해야합니다. 그런 이유로 네덜란드는 50년 전 컨템포러리 발레를 시작했고 현재 최고의 수준에 있습니다. 한국도 안무가가 발전해야 발레가 높은 수준으로 갈 수 있습니다. 현재 외국에 나가있는 무용수들이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돌아왔을 때 한국 발레에 기여할 것이라고 봅니다.

-네덜란드의 컨템포러리 발레가 현재의 명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네덜란드의 무용역사는 짧습니다. 불모지였던 1940년대 후반부터 무용과 관객이 함께 시작했다고 봐요. 그러니 이전의 전통도 없고 새로운 것에 반대할 보수적 시각도 없었어요. 안무가들은 새로운 것들을 쉽게 만들었고 관객들에 의해 선입견 없이 평가 받으며 좋은 것들만 남게 된 것이죠. 그렇게 컨템포러리 발레가 발전한 것입니다.

-클래식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클래식 발레를 잘하지 못한다면 창작발레도 잘할 수 없어요. 네덜란드의 무용단들은 피나바우쉬나 윌리엄 포사이드의 무용수들과 마찬가지로 클래식 발레를 훈련 받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안무가들의 작품이 현대적인 것이지 발레의 기본은 철저히 관리되고 있습니다. 물론 클래식 공연도 많이 하고 있어요.

- 무용가로써 어떤 철학을 갖고 있나요?

항상 새로운 작업을 해야만 예술가로써 죽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만의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살아있다고 느껴요. 지금까지 나의 안무작이 120개 정도라고 하는데 사실 방송 안무까지 합치면 150여개의 안무작이 있습니다. 지금도 쉬지 않고 롤링스톤즈나 비틀즈의 음악 등 다양한 요소들로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 안무에 있어서 무용수의 권한은 어디까지 인가요?

나의 신작 대부분은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에서 발표되는데 모두 오랜 시간 함께한 무용수들입니다.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나의 안무수준이 높아질 수 있고 무용수들도 수월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흡이 잘 맞는다고 해도 무용수에게 안무의 일부를 일임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동작은 제가 직접 만들고 전달합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 무용수들의 우연한 실수가 원래 안무 보다 좋을 때가 있는데 그땐 계속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기도 합니다.

- 네덜란드 태생이죠? 그것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무용이라는 것이 국제 언어이므로 네덜란드 태생이라는 것이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네덜란드의 화가들과 음악가들의 작품과 함께 커왔으니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 됩니다. 특히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10살 때부터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해서 지금은 꽤 많은 양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답니다.

- 처음 무용을 시작한 때를 기억하나요?

정확한 이유는 기억할 수 없지만 7살 때부터 무용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보던 서커스나 뮤지컬, 오페라에 나오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무용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특히 요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는 영화관 휴식시간에 막간 공연이 있었어요. 그 공연에서 춤을 제일 좋아했던 걸 보면 아마 그 때문에 무용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겁니다.

- 결국 무용수가 됐고 젊은 나이에 안무를 시작했죠?

18살에 소망대로 무용수가 되었어요. 23살에 우연히 안무를 시작했는데 첫 작품부터 성공을 거두었어요. 두 번째 작품은 350회나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초청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국가의 지원 없이 먹고살기 위해 한 겁니다. 동작을 다 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무대도 있었지만 행복한 시절로 기억됩니다.

-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은 어떤 안무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나요?

네덜란드의 무용 대중화를 위해 일조한 안무가라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부터 TV용 작품을 많이 안무했고 주부, 직장인, 공장 노동자를 위한 작품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혹자는 TV로 다 보여주면 아무도 극장에 공연을 보러 오지 않을 거라 걱정했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용을 즐기게 되었고 지금까지 꾸준히 스스로 극장을 찾고 있습니다.

-사진작가로도 활동하셨죠?

오랫동안 사진 찍는 일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일이었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결국엔 선택을 해야만 했어요. 당연히 춤을 선택했고 1992년 그만두었습니다. 사진뿐 아니라 그림, 음악, 문화전반에 관심이 많습니다. 요리도 직접 하는 것을 즐기는데 의식하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들이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 요즘의 춤을 보면서 미래의 춤에 대해 어떤 예견을 하나요?

현재 좋은 안무가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윌리엄 포사이드, 지리 킬리안, 피나바우쉬, 크리스토퍼 빌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그밖에도 폴 라이풀, 리온 등 훌륭한 안무가들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안무가가 많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춤의 미래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 Non-Dance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요?

대부분 Non-Dance작품들은 수준이 높지 않습니다. 60-70년대에 아무나 춤 출수 있다고 하면서 너도나도 무용가 행세를 했지만 그건 한 때의 반란일 뿐 진정한 춤이 아닙니다. 피나바우쉬나 윌리엄 포사이드 등이 퓨전 스타일이면서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춤의 중요성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준 높은 전문가가 아니면 출 수 없는 것을 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과 구분되는 것이고, 그 점이 내 집 거실이 아닌 극장을 찾아 공연을 보게 하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 가장 이상적인 무용수는 어떤 사람일까요?

실수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줄 아는 사람이겠죠. 그리고 춤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무용수입니다.

- 신작에 대한 계획이 있나요?

내년 3월에 신작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 내용은 아직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어요.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작업이라 음악 선정에 특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여러 경로로 음악을 찾는 중인데 겨우 마음에 드는 음악을 한 곡 골랐더니 피아노 연주곡이더군요.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도록 음악감독과 타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어요. 무용수의 규모도 아직은 계획 중에 있습니다.

- 춤은 당신 인생에서 무엇인가요?

나의 모든 것입니다. 많은 것에 관심이 있지만 그 무엇 보다 춤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나의 모든 것입니다. 춤에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들어있고 내가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 한국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마디로 “무조건 와서 보세요.”입니다. 책도 한권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권 읽듯이 무용에 대해 많이 알고 싶다면 가능한 많이 보시길 권합니다. 음악회에 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문가가 아니듯이 무용을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 분석하고 이해하려들지 말고 많이 보고 많이 즐긴다면 좋겠습니다.

-한국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돌아가시나요?

네덜란드에 돌아가면 한국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며칠 전 다녀온 리움미술관의 건축물과 미술품들, 어딜 가도 친절한 한국 사람들, 유니버설 발레단과의 유쾌한 작업, 훌륭한 한국 음식 등 많은 것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에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글_김예림 무용평론가 yelim110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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