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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의 희곡읽기 18] 사랑의 독약? 묘약?

 

조심해서, 살살, 병을 살짝 흔들어준 다음 마개를 뽑으라고.
김이 새지 않게 조심하고.
이제 내일이면 모든 여자란 여자는 다 자네거야.

저는 한 여자만을 위해 그 약을 마시려고요.
아무리 예쁜 여자가 있더라도 전 그녀만을 위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셔버릴 겁니다.


‘독’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것…….
1.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교복을 벗고 어른입네 하며 파마를 하고 커다란 링 귀걸이를 하고 작은 핸드백과 파일로 여대생의 이미지를 구축하던 그 시절. 비장의 무기로 삼았던 것이 바로 향수. 성인과 학생을 가장 극명하게 구분지어 준 게 이 향수였다. 그때 가장 유행해서 어딜 가나, 누구에게서나 맡을 수 있었던 향수는 프와종(poison). 코는 신체부위 가운데 가장 기억력이 좋은가 보다. 지금도 그 향수를 뿌린 사람, 그 향수의 향기는 분명하게 가려낼 수 있으니. 아니다. 어쩌면 나는 그 향수의 이름처럼 그 독성에 여전히 감염된 상태인지도…….
2.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단순한 열정>.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로 시작되는, 오래 전 읽은 그 소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단순해질 수 있는가? 그런데 그게 정답이 아닐까.


사랑은 일종의 화학작용이다. 남자와 여자가 알 수 없는 감정의 기류에 휩싸여 자석처럼 끌리다가 급기야 중독 증상을 일으킨다. 중독이라니. 뭔가에 감염되어 신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금기시되는 약물처럼 금단현상을 일으키기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랑을 중독증상으로 표현한다. 사랑에는 독과 비슷한 무엇이 있나보다.
우리는 독약이 사랑의 매개체로 사용되는 연극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독성을 가진 식물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르네상스시대의 희곡이나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독약은 오히려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독약은 묘약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꽃즙을 눈에 바른 후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는……. 일부러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어도 겨냥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 빠지는 것을 보면 인연은 따로 있음을, 아무리 약을 써도 정해진 운명의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이런 계획이나 준비와는 관계없이 찾아오나 보다. 우연에 의한 또는 행운에 의한 그 무엇이 사랑이 아닐까? 약제사의 속임수이긴 했으나 <사랑의 묘약>에서 사용되는 독약도 결국 사랑을 이어준다. 그걸 보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이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독약이 두 연인이 죽음을 택하는 이유가 되며 사랑의 종지부를 찍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런 독약을 사용하는 배경으로 주로 숲이 등장한다. 일명 전원목가극. 이탈리아 작가 타소(Torquato Tasso, 1544~1595)의 <아민타 Aminta>가 대표적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 숲을 이상향(아카디아)으로 그리곤 했다. 거기선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없고 일상의 공간이 아니기에 인간의 법칙이 아닌 신비한 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독약이든 묘약이든 그 사용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전국이 온갖 ‘리스트’에 감염되어 새로운 계절의 기지개를 위축시키는
이 봄…….
독약이 될지 묘약이 될지 두려워 말고 사랑에 빠지기를.
설령 그 독에 심하게 감염된다 해도 때가 되면 회복의 날이 오리니.




글 김지명(극단 <표현과 상상> 무대감독) jeem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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