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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의 희곡읽기 17] 현실의 나를 찾아서 -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II

 

“극장 안에서는 연극의 관례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해.”

이태준 선생은 「무서록」이라는 수필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만드는 인물이라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려니 했다가 몇 번 실패하였다. 얼굴이 생기고 말씨가 나와 버리어 한번 성격이 결정만 되면 천하 없는 작가라도 그 인물에게 끌려 나가든지 그 인물을 잡아버리든지 두 가지 길밖에 없을 것이다. 사건의 발전을 봐서는 꼭 필요한 행동인데 인물이 듣지 않는 경우가 여간 많지 않다. 사건은 완성시키지 못할지언정 인물을 어쩔 수는 없는 것이다. 작자가 예상한 사건을 원만히 행동해주는 인물,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복안을 오래 끄는 시간 여유가 제일이라 생각한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고민을 하나보다. 하긴 생각해보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마음에도 없는 말로 뜻하지 않은 이별을 겪는 일도 다반사인,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인생사에서 아무리 창작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실체로 보이고 난 후에는 어찌 그를 자신의 의지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최소한의 창작자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려면 느긋하게 대처하는 마음의 여유라니 성급한 언행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기억해 둘 만하다.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쓴 루이지 피란델로 역시 이태준 선생과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그의 삶의 여정에서 이 점이 좀 유별나 보인다. 시칠리아의 아그리젠또 태생인 피란델로는 이탈리아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극작가요, 소설가다. 팔레르모, 로마대학을 거쳐 본 대학에서 로망스어를 전공하고 귀국하여 로마에 살면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03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유황광산이 홍수에 휩쓸려 궁핍한 생활에 빠진 데다 아내인 안토니에따마저 정신질환을 일으켜 그녀가 죽기까지 무려 15년 동안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학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고, 많은 희곡 속에서 격렬한 페이소스를 담은 반리얼리즘의 작풍을 수립했다. 험난한 인생을 작품 창작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희망과 꿈을 찾은 게 아닐는지... 그렇기에 현실을 고스란히 무대에서 보여주는 사실주의에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인생을 생명과 그 형식과의 갈등으로 파악한 그는 연극을 그 절대의 형상이라고 생각, 한낱 그림자의 조직일 뿐인 리얼리즘의 세계를 무대에서 역전시켜 보여주었다. 즉 인간의 다양한 행위의 밑바닥에 도사린 존재의 심연을 파헤침으로써 오늘날 부조리극의 길을 열어준 혁명적인 극작술을 남긴 것이다. 1921년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비롯하여 <오늘밤 즉흥공연을>, <엔리코 4세>, <리올라>, <당신이 옳다면 그건 옳아>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노출시키고 이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특히 우리가 흔히 연극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 즉 실제의 시간은 1시간 반이 흘렀으나 연극 안에서는 그것이 1분이 될 수도 있고 수년의 시간이 되는 그런 허구적 시간의 흐름을 현실의 시간에 일치시켜서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자신들이 연극을 보고 있음을, 허구의 시간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가령 등장인물끼리 속삭이자 그러면 관객이 어떻게 듣느냐며 크게 하라고 주문하자 어떻게 우리끼리의 얘기를 크게 하느냐며 반문하는 장면이라든가 아버지와 의붓딸은 그들이 주고받은 대사를 주역 배우들이 하는 것을 들으면서 본인들이 주문한 것과 전혀 다르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실례지만 그 몸집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나타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니 생김새의 문제는 제쳐놓고서 생각해 보십시다. 문제는 저라는 인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겠죠. 제 마음 속 깊이 제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하는 것은 제쳐놓고요. 아무튼 우리를 비평하고자 할 때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셔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자기 연극을 갖고 있단 말이야. 인물 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 잘났다고 나머지 사람을 다 눌러버리고서 언제나 무대를 차지해 버릴 수는 없는 법이야.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야 완전한 틀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나타내기 알맞은 것만 나타내는 거야. 나는 어디 모르나, 사람이란 누구 할 것 없이 자기의 생명을 갖고 있고 또 그것을 바깥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을. 하지만 여기에 어려운 점이 있어요. 그중에서 절대 필요한 것만을 어떻게 꺼내는가, 그와 동시에 나머지 인물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배려해 주는가, 그리고 그 조그만 테두리 안에서 한 인물의 모든 내면의 생명을 어떻게 암시해 주는가, 문제는 여기에 있어. 인물마다 근사하게 자기 독백을 할 수 있다면 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예 관객을 향해 연설을 하고서 자기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것을 탁 털어놓을 수 있다면, 세상에 연극같이 손쉬운 것이 어디에 또 있겠나!”

“아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예요. 언제나 일어나고 있어요! 이 고통은 단순한 시늉이 아닙니다. 전 이 고통,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 고통 속에 언제나 살고 있어요.”

“등장인물이란 언제나 사람을 보고 누구냐고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등장인물이란 특별한 성격을 지니며 자신의 인생을 갖고 있는 존재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어떤 남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도 되지 않는 겁니다. 일단 등장인물이 살게 된 때, 진실로 살아서 작가 앞에 서 있게 될 때, 그 인물이 제안하는 대사나 몸짓을 그냥 따라가는 일밖에는 하지 않는 겁니다. 등장인물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어야 하는 거예요. 등장인물이란 일단 태어나면 작가와는 독립된 존재가 돼버리지요. 그를 만들어준 작가로부터 독립되는 거예요. 작가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오만 가지 상황 속에 넣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작가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의미를 얻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이 제안한 공연(극중극)은 죽음 혹은 소멸로 끝난다. 그러나 보고 있던 배우들은 가짜라고, 거짓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진실이라고 외친다. 공연이 끝나고 불이 켜지면 원래 극장에 있던 사람들만 남는다. 연출자가 퇴장한다. 그러면 등장인물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듯 등장해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사라진다.

이 작품은 연극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실제 인간(배우)과 그들이 표현하는 인물(배역) 사이의 갈등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관객인 우리는 스스로 묻게 될 것이다. 과연 우리가 본 것 가운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나도 모르게” “나도 어쩌지 못 하는” 상황에서 저지른 언행은 ‘허구’의 내가 한 일로 믿고 싶은, 현실의 나를 부정하고 싶은, 그런 현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정말 ‘현실’의 나라고 믿으며 살아야 할 테지만 말이다.




글 김지명(극단 <표현과 상상> <안은미 무용단> 상임 무대감독) jeem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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