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힙합과 무용을 비교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선 본인이 힙합을 직업으로 하고 있으며 무용을 학업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춤의 공연도 하고 있다. 즉 두 춤 모두 같은 춤이다.
두 춤이 같다는 점에 대해 틀린 것은 없다. 다만 다른 것이 있을 뿐이다.
철학적 이유를 얘기하자면 본인은 자극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극은 극단을 추구하고 그러한 극단은 자극을 추구한다. 이러한 극단적 자극은 활동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다. 특히 비난에 의한 분노는 사람을 아주 활동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다. 복수를 예로 들어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 자극의 반응이든, 부정적 자극의 반응이든 간에 최소한 서로를 무관심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의 삶에서도 가장 외롭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 무관심이다. 본인은 이러한 무관심을 자극을 통해 넘어 서려고 하는 것이다. 긍정적, 부정적 반응은 모두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극단적 생각이지만 독자에게 자극적인 언어는 분명 글 읽기의 집중과 자극이 될 것이다. 때론 깊이 있고 교양 있는 아주 지루한 말 보다는, 현명한 욕 한마디의 자극이 사람을 극단적인 집중을 시킬 때가 있다.
이러한 자극이 상대편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만, 이러한 자극적 상대를 본능적으로 원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더불어 살기도 힘든 것이다. 인간은 원초적 본능으로 말하자면 누구를 위하고 싶다는 것 보다는 그 사람으로 인해 무엇을 얻고 싶어 하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괴롭히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더불어 산다는 것은 서로 욕망하고 경쟁하고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투쟁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더불어 사는 삶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경쟁과 적, 복수의 자극은 인간을 빠른 발전을 이룩하게 한다.
이러한 이론적 자극에서 시작된 세계화가 바로 혁명인 것이다.
이런 자극은 특히 예술가에게는 창조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스웨덴의 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작품 『꿈 연극』에서 마지막 ‘딸’의 대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서로 다른 둘 사이의 다툼은 힘을 만들어. 불과 물이 증기를 만드는 것처럼.”
위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쟁과 적의 다툼은 최소한의 무엇을 생성한다. 이것이 예술에서는 무한한 자극의 창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앙토넹 아르토’의 잔혹극 중 ‘잔혹’에 의해 생각이 창조로 발전한다는 것처럼. 본인의 이론에서는 ‘잔혹’은 곧 ‘자극’으로 해석되고 그 생각이 발전하여 창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극을 예술힙합의 삶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상이 바로 무용이다. 왜냐하면 홀로 발전하기 보다는 좋게는 경쟁상대, 나쁘게는 적, 복수의 힘 등이 이것을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 힙합은 홀로 예술의 삶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젊고 외롭기 때문이며, 무용은 홀로 예술의 현대화에 다가서기에는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즉 무용은 힙합과 같은 선상의 육체 표현으로서 사회적으로 다른 부류를 생성하는 예술이지만, 이러한 무용에서 힙합은 자극을 받고 자극을 주기 위해서 가장 유사한 예술인 무용을 택하게 된 것이다. 두 관계가 적대적이든 상호보환 적이든 간에 두 부류는 춤이라는 하나의 육체의 표현 예술로서 예술의 지양으로 인해 최대의 창조의 지향을 지니게 될 것이다. 현대무용이 초창기에 발레에 대한 적대적 관계에서 현재에는 서로 보완적인 발전 관계가 형성된 것처럼 자극과 자극의 상태에서 힙합과 무용이 자극적 비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서로의 비판과 비난 그리고 어색한 칭찬으로 인해…….

글_이우재 up_rockp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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